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태춘 (문단 편집) === 데뷔 - [[시인의 마을]] ===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ㅡ《시인의 마을》 [[파일:external/img.maniadb.com/100200_3_f.jpg|width=350]] 정태춘 1집, [[시인의 마을]] [include(틀: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순위=66,연도=1998,순위2=56,연도2=2007, 순위3=66,연도3=2018)] [youtube(r2vZK_sfJyo)] 1집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 당시 여전히 대중문화 전체를 포크가 지배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발표된 그의 첫 번째 음반은 꽤나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그에게 나름대로 여유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보면 뭔가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당대의 포크송들이 대부분 미국의 번안곡들을 포함하여 서양 중심적인 형태를 보인 것에 비해 정태춘의 음악은 기타를 베이스로 하는 포크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한국적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가사에서 나타나는 미학적인 수준도 꽤나 대중들의 공감을 사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싹수가 보이는 대중가수로 평가받았다.[* 이 시기는 트윈폴리오를 위시한 세시봉 일원들의 미국적 포크에 대한 열광의 시기를 지나 [[한대수]]라는 전무후무의 독특한 가수에 의해 대중의 수용도가 꽤나 넓어져 있던 시기인 것도 긍정적 요인이었다.] 이 시기 같은 서라벌 레코드 소속 가수였던 박은옥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하게 되면서 적어도 외적으로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상까지 수상하면서 '연예인'으로서도 성공을 거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 그의 향후 행보를 결정하게 되는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시행한 음반사전심의제도[* 음반에 관한 법률 제9조 및 10조.]와의 만남이다. 그의 첫 번째 음반의 대표곡인 '시인의 마을'을 포함하여 몇몇 곡들은 공윤에 의해 가사 변경을 권고(라고 쓰고 변경하지 않으면 음반 발매가 안되니 '명령'이라고 읽는다.)받게 되고, 서라벌 레코드에 의해 가사를 수정하여 발표한다. 일례로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의 경우에는 가사 중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대목이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강제로 엉뚱하게 바뀌었다. 이 일은 이제 갓 입봉한 신인 가수 입장에서 뭣도 모르니 시키는대로 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깊은 내면의 고민 끝에 만든 자신의 곡이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그것도 합당하지도 않은 의견과 더불어 수정을 강요당하는 경험은 그에게 또다른 고민을 안겨준 듯 하다. 또한 이 시기의 그는 예나 지금이나 신인 [[연예인]]이 거칠 수밖에 없는 방송국 출연을 통한 홍보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고민을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트레이닝복을 입고 '명랑운동회'에 나가 뛰고 구르고 실에 매달린 과자를 따먹거나 밀가루 범벅에 얼굴을 파묻고 찹쌀떡을 먹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러한 고민이 그저 내면의 고민으로 끝나지는 않는 법, 그는 방송국 관계자들로부터 신인 주제에 건방지고 뻣뻣한 놈으로 인식되었고 자연스럽게 기피 대상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