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태춘 (문단 편집) === 출생 및 성장기 === 1954년 [[3월]], 경기도 평택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5남 3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포털사이트의 인물정보를 포함한 각종 공식 프로필에는 1954년 10월 10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대 흔했던 늦은 [[출생신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출생하여 자랐던 평택의 도두리(棹頭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위치한 곳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주로 왕래하던 장은 [[충청남도]] [[아산시]](당시 아산군) 둔포(屯浦)면에 위치한 장이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성장기를 모두 이곳에서 보냈으므로, 이 성장기의 환경은 이후 그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자작한 노래들 중 초기작들의 가사 내용과 이후 설명될 평택 미군부대 이전 반대 활동의 개인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시골의 가정이었지만, 악기를 접하고 취미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아주 빈농의 가정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생활에서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로,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매형이 가지고 온 [[기타]] 때문이었다고 한다. 무료한 농촌 생활이니만큰 그와 그의 셋째 형은 틈만 나면 이 기타를 붙잡고 놀았는데, 얼마나 가지고 놀았으면 한 번 들은 노래의 멜로디를 기타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로 긴 시간 동안 많은 빈도로 악기를 가지고 놀아본 이들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코드나 주법의 체계적인 방법은 모르지만, 어찌어찌하면 이러한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라는 걸 체득하는 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걸 가지고 천재적인 재능을 어렸을 때부터 지녔느니 하는 건 오버일 수도 있다. 심지어 [[모차르트]]마저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그 아버지의 강요로 인한 피나는 연습 끝에 체화된 음악적 능력에 기반한 음악가라고 할 수도 있다. 여하튼 이 기타로 인해 음악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평택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악기와 본인의 궁합이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여 [[평택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하며 음대에 진학할 꿈을 가지게 된다. 판단할 요소가 많진 않지만, 당시 정태춘의 모습은 소박한 시골에서 바이올린을 사랑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성적인 소년이 맞이한 첫 번째 시련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연주할 수 있었던 학교의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된 것이었다. 당연히 밴드부에서 현악기의 존재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그가 느꼈던 절망감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이후의 진로가 통째로 날아가버린 암담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앞날이 불투명한 시골 청소년들의 루트인 무리지어 몰려 다니기, 흡연, 외박 등이었다. 비록 내성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희망 학생에서 시골의 불량 잉여로 전락해 버린 그였지만, 이 시기에도 버스에 낀 성에를 갖고 시를 지어 보일 만큼 감수성 하나만큼은 다른 잉여들과 다른 점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대학진학은 실패. 하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고,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을 타의에 의해 좌절당해 방황하는 것을 보기 안스러웠는지 집안에서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30만원 가량의 바이올린까지 사서 그를 셋째 형이 있는 서울로 그를 보내어 을지로 3가에 있었던 서울음대에 레슨까지 받게 하며 재수생활을 하게 한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정신적, 심리적 상황은 외모에 대한 자학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잘 알지도 모르면서 [[헤르만 헤세]]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탐독하고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면서 자신이 직접 제조한 독약을 항상 품에 품고 다니는 등 뒤늦게 찾아온 [[중2병]](...)에 쩔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입시 직전이던 1972년 10월 소위 [[10월 유신]]이 발표되자마자 재수생활을 때려치고 귀향하는데, 이는 딱히 확고한 정치적, 사회적 신념에 찬 결의였다기 보다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염세적 자세가 임계점을 넘나들던 가운데 발생한 사회적 이슈가 발화점이 된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심양면으로 신경써서 보냈던 어린 자식이 무작정 짐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에서 반겨줄 리가 만무한 상황에서 그는 몇 번씩이나 무작정 집을 나가 전국을 방황하거나 목욕탕의 화부[* 당시 대중목욕탕은 기름보일러나 가스보일러가 아니라 장작으로 불을 떼서 물을 데우는 방식으로, 목욕탕 화부는 증기기관차의 화부와 동일한 일을 하는 당시에도 3D 중의 3D 업종이었다고 한다.]로 일을 하는 등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고행을 한다. 다만, 이러한 경험은 당시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는 그저 방황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기에 그에게 축적된 감수성, 혹은 내재적인 사고들은 그의 음악적 세계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보여진다.[* 1988년 발표된 '무진 새노래'에 실린 '얘기2'의 가사에 이 당시 그가 느꼈던 것들이 나름대로 잘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도중 그는 입대를 하게 되고, 군생활 가운데 그의 초기작들을 작곡하게 된다. 어찌보면 외적인 방황이 제한된 군생활이 그에게는 오히려 내재된 정서를 정리하여 음악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대한 1978년 6월, 그는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음악평론가 최경식[* 전 [[기독교방송]] 프로듀서이자 평론가로서 가수 최양숙의 친오빠이다. 정태춘 외에도 [[김민기(가수)|김민기]]와 [[이정선(1950)|이정선]]의 데뷔음반 제작에 도움을 주었다.]의 소개로 서라벌 레코드와 인연을 맺어 군생활 동안 정리한 곡들을 처음으로 음반으로 만들어 발표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