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철 (문단 편집) == 기타 == * 정치인으로서의 악명은 민담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강원도]]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정철 관련 설화들에서는 성질이 고약하고 사소한 것에 트집을 잘 잡는 쪼잔한 인간으로 나온다. 능력보다 인성을 중시한다는 [[유교]]와 그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통렬한 일격을 가하는 가짜 [[선비]]. 예를 들면 어느 마을에 갔더니 주민들이 바위를 섬기니까 바위를 쪼개버렸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왠지 강원도 [[관찰사]] 시절 강원도 백성들한테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관찰사들은 강원도 전역을 다 돌아다니지는 않았는데 정철은 강원도의 모든 시/군을 전부 방문하는 나름 기록도 남겼다. '정철 같은 놈'은 한동안 [[탐관오리]]를 상징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웃기는 건 본인은 <[[관동별곡]]>에서 '급장유와 같은 좋은 정치를 하겠다'라고 큰 소리친 전력이 있다는 것. '선정에 대한 포부'라고 배운 그 부분 맞다. * 좋은 평가도 있기는 한데 <[[징비록]]>과 이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조선)|선조]]가 왜란 발발 후 5월 1일에 [[개성시|개성]]에서 몽진을 갈 때 길가의 백성이 "정철 정승을 불러 쓰소서." 해서 정철을 복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실은 개성의 유생들이 선조가 사람을 천거할 것을 명하자 정철을 청한 것으로 당시 개성은 유생들의 절반이 [[성혼]]과 [[율곡 이이]]의 제자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기호학파의 세가 강한 곳이었다. 정철이 성혼과 이이의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니 이 사건은 이를테면 '동인들 때문에 나라 꼴이 이렇게 됐잖음? 우리 사숙어른 복귀 좀요' 정도의 사건으로 이해 가능하다. 그러니까 [[양반]](같은 당색의 유생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좋은 평가를 내렸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화다. 사실 백성의 청원은 전후 관계와 <[[선조실록]]>과 비교해 보면 완벽한 [[역사왜곡]]이다. [[임진왜란]] 직전 정철은 [[평안북도]] [[강계시|강계]]로 [[유배]]가 있었는데, 당시 선조가 강계로 피난갈 계획을 잡았고 이것 때문에 강계 지역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어서 강계로 유배가 있는 고위 관료인 정철을 부른 것이다. 실제 정철은 선조를 만나자마자 첫 어두부터 강계 이야기로 시작했으며 백성의 추천으로 정철이 등용되었다면 무슨 정치적인 토론을 벌여야 하는데 정철과 선조는 만나자마자 오로지 강계의 상황에 대해서만 묻고 답한다. * 백성들에게 악평을 얻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말년에 [[강화도]]로 유배 가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되는데 나름 핵심 권력자였던 양반이 강화도 주변에서 지원을 못 받아서 친구에게 구휼 요청을 보낸다. 백성들 입장에서 자기나 친인척이 [[왜구]]랑 죽도록 싸우는 상황에서 동맹국에 사신으로 가서 가짜 정보를 퍼트려 이적 행위를 저지른 인간을 결코 좋게 볼 리가 만무하다. >'''정송강은 술에 취해 있어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 [[류성룡]], 운암잡록(雲巖雜錄)에서[* 류성룡은 위에도 언급되었듯 대인관계가 개판이었던 정철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던 인물임에도 그의 주벽만큼은 넘어가지 못했던 것 같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도승지 정철은 술주정이 심하고 광망하니 체직시키소서. 원접사의 종사관은 그 재주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때의 극선인 인물이어야 하는데 고경명은 전일에 권간에게 붙었었으니 다시 차임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연일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실록]]>> 13년 9월 13일 >[[사헌부]]가 아뢰기를, "예조판서 정철은 술을 좋아하고 실성하여 지난날 승진 발탁했던 일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물의가 많은데, 반년도 채 못 되어서 또 갑자기 종백으로까지 초수하니, 물정이 온편치 못하게 여깁니다.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실록>> 16년 4월 1일 > 밤 이경에 급보가 [[평양부|평양]]으로부터 왔다. 임금께서 여러 대신을 빈청으로 불러서 회의하였는데 영중추부사 정철은 술에 취하여 오지 않았다. ><<선조실록>> 25년 7월 25일 * 술 좋아하기로는 [[정조(조선)|정조]]와 더불어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로 그 정도가 지나쳐 폭음에 따른 주사로 낭패를 본 일도 많았다고 한다. 작품 중에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라는 <장진주사>[* <장진주사>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걸 시조로 보는 입장과 가사로 보는 입장이 있는데, 시조로 보는 보편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이 사설시조의 원형 혹은 최초의 사설시조가 된다.]라는 작품도 있을 정도. 왕인 선조가 정철의 애주에 감탄해 하사한 술잔 역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선조가 "그대가 술을 좋아하나 너무 과함이 걱정되니 앞으로 이 잔으로 하루에 한 번만 마시라"는 의미로 하사한 은잔을 정철은 한 방울이라도 더 마셔보겠다는 집념으로 [[망치]]로 두드려 펴서 사발로 만들어 마셨다고 한다.(...)[* 송강 정철 13대 후손 왈 : 송강에게 절주하라고 선조대왕께서 은대를 내리셨는데 그걸로 자시다보니 적어서 더 먹었으면 해서 망치로 두드려서 늘렸다고 하는 일설이 있는데 확실한 얘기가 아니고 자국이 조금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만드는 과정에서 두드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망치 자국이 보이는 것이지 일설과 같이 술을 조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망치로 두드렸다고 하는 건 신빙성이 없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 다만 [[http://img.kbs.co.kr/cms/ICSFiles/artimage/2008/01/16/c_1ts_hkuk01/kr_jc4.jpg|실제 은잔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술잔이라고 하기에는 사발만큼 크며 망치질된 모양새가 왕의 하사품치고는 매우 조잡하다. 물론 안 그래도 정철이 속 좁기로 유명한 선조에게 찍힌 마당에 왕이 하사한 물건에 이런 짓을 하다가는 목이 남아났을지도 의문이다. 정철은 [[세자]] 건저의 문제가 터지기 이전부터 그 특유의 지독한 성격 때문에 선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성종(조선)|성종]] 시절의 [[재상]]이자 [[술고래]] 손순효가 원조이며[* 하지만 손순효가 재상으로서 발휘한 능력은 정철 따위가 비빌 레벨이 아니었다. 성종이 평소 말술인 손순효를 걱정하여 은으로 만든 주발을 하사하고 "이걸로 하루 3잔만 마시게"라고 어명을 내렸지만, 손순효는 그것을 대장간에 맡겨 거의 세숫대야 사이즈로 늘려서 3잔을 마셨고 혀가 꼬부라질 정도로 취중이던 차에 성종이 [[명나라]]에 보낼 외교 문서를 쓰려고 손순효를 불렀다. 그러나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 입궐한 손순효를 본 성종이 "하루 3잔만 마시라고 했는데 과인의 말을 어긴 것인가?"라고 책망하자 크게 늘린 주발을 보여주며 "신은 분명히 이것으로 딱 3잔만 마셨사옵나이다"라며 답했고 어이가 털린 성종은 외교문서를 다른 신하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손순효가 부득부득 자기가 쓰겠다며 우겨서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는데 그게 또 기가 막히는 명문이라 성종도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성종 또한 소문난 술꾼이었는지라 틈만 나면 손순효와 허리띠 풀고 부어라 마셔라 할 정도로 죽이 잘 맞았다.] 정철이 이 이야기를 주워듣고 술잔을 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철과 친분이 있던 [[류성룡]]조차도 정철의 술버릇에 대해 "정송강은 술에 취해 있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평안도]] [[강계시|강계]]로 유배되었을 때 만난 진옥이라는 [[기생]]과 나눈 화답시조가 있다. 꽤나 로맨틱하면서도 야한 시조다.[[https://www.asiae.co.kr/article/2016050315084960851|'옥이 옥이라커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