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철 (문단 편집) === 건저의 사건으로 몰락과 최후 === 권력의 중심에 다시 오른 정철은 세자 책봉 문제에서 결정적인 판단 미스를 하고 만다. 후사 논의를 조심스러워하는 [[선조(조선)|선조]]의 의중을 모르고 서둘러 [[광해군]]으로 세자 책봉을 해야 마땅하다는 읍소를 올린 것.(송강연보의 기록) 이를 정철의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이라고 한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선조는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빨리 후사를 명확히 해 두지 않으면, 불상사가 일어날 소지가 있었다. 이에 동인의 대표인 [[이산해]]와 서인의 대표인 정철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철과 원한이 있었던 동인 측이 도중에 빠지는 바람에, 정철만 혼자 나서는 모양새가 되어 정치 생명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다. 이산해는 아예 나서지 않았고 [[류성룡]]은 나섰어도 입을 다물어 버렸는데, 정철만 홀로 후계 책봉의 정당성을 열을 내며 주장했던 것이다. 엉뚱하게도 선조는 "내 나이 젊거늘 경은 내가 빨리 죽길 바라는 게요?" 라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말이 있는데, 진짜 선조가 이런 말을 했다면 '''[[꼴통|왕 자격이 정말 없다]]고''' 봐야 옳다. 우선 세자는 왕이 젊은지 늙은지와는 연관없이 책봉된다. 대게 원자의 나이 8살이면 [[성균관]] 입학례와 세자 책봉례를 치러 세자가 된다. 즉 나이랑 책봉은 관계없는데, 억지 쓴 것. 당장 [[세종대왕]]만 해도 '''26세'''에 세자를 책봉했다. 물론 대군이 아닌 군을 책봉하는 첫 사례인 만큼 조심스레 할 필요도 있었지만, 40대에 접어든 [[선조(조선)|선조]]가 할 말은 아니었다. 이 과정이 이산해의 계산이라는 설도 있다. 건저의 문제에 대해 선조의 의중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철의 성격이 급한 반면 류성룡의 성격은 침착해서 절대 입을 먼저 열지 않을 것이므로 이산해마저 입을 다물어 버리면 성격이 급한 정철이 먼저 입을 여는, 즉 총대를 메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정여립 모반 사건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동인은 정철에게 카운터로 '[[신성군]] 목숨이 오락가락' 드립을 날린다. 물론 이전의 정여립 모반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사실 그 자체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정계의 밉상인 정철을 탄핵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선조는 이 절호의 찬스를 적극 활용, 세자책봉 논의 자체를 막는 한편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지나치게 입지가 커진 [[서인]] 세력을 손보기 위해 모르는 척 받아들인다. 이것 역시 정여립 모반 사건 때와 완전히 동일한 수순이다. 정철을 밟아 버리기로 결심을 굳힌 선조는 [[정여립의 난]]에서 정여립의 체포 당시에 죽었던 [[길삼봉]]이라는 것과 선조에 의해 예비 권간으로 지목당해서 누명을 쓰고 죽은 남명 [[조식(조선)|조식]]의 제자 최영경의 죽음을 애도하며 정철을 비난했다. 선조는 이 구실로 정철을 지근지근 밟아 버렸는데, 실록에는 조회에서 정철을 가리켜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이라고 대놓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이때 같이 까인 인물이 정철과 함께 당시 서인을 이끌었던 [[성혼]]이었다. 때문에 간혼독철이라고 같이 붙어서 표현된다.]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 [[성혼]], [[윤두수]], [[윤근수]], 이해수, 홍성민, 이산보,[* 동인 영수인 이산해와는 사촌 형제로 이이와 친했기 때문에 서인이 되었다.] 박점, 황정욱, 백유함,[* 백인걸의 아들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죽은 백유양과는 사촌지간이었다.] 유공진, 장운익 등 서인들은 죄다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동인이었던 이성중과 동인 영수 [[허엽]]의 사위인 [[우성전]]도 건저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성중은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었을 때, 정철의 세자 책봉 주장에 동조해 정철의 무리로 몰려 유배되었다. 우성전은 홍문관에서 정철을 탄핵하는 차자를 올리려 할때 부제학인 김수와 이를 논의했다가 제때 차자를 올리지 못한 일 때문에 정철의 무리로 몰려 유배되었다.] 양천경, 양천회 등 최영경 등을 무고한 자들도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웃긴 것은 양천회, 양천경 등의 무고를 보고 선조는 처음엔 "이런 상소를 이렇게 늦게 올리다니!" 라고 한탄할 정도로 띄워 줬다는 것이다. 선조도 최후의 양심인진 몰라도, 역모 조작자로 몰릴 수도 있는 정철에게 추가적인 죄를 내리진 않았다. 어쩌면 또 [[기축옥사]] 같은 일이 생기면 써먹으려고 남겨놨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선조는 대신이라 해도 가차없이 쳐버렸지만 각 세력의 핵심 인물들은 뭐가 되든지 간에 보호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기축옥사 때 심문받던 이들에게서 류성룡의 이름이 나오자 류성룡이 피혐을 했는데, 선조가 "금옥같은 선비" 라 부르면서 옹호했다. 이는 결국 [[정여립의 난]]의 참혹한 옥사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죄는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후일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에 잡혀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곤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당시 동인이 정철의 처리를 놓고 갈등하던 것은 [[이산해]]의 강경파이자 [[광해군]]의 지지 기반인 [[북인]], [[류성룡]]의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북인의 인맥은 [[조식(조선)|조식]]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일대(호남+영남 서부)였고 남인의 인맥은 그보다 동쪽인 [[경상도]] 일대였는데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가 호남 동인 인사들의 씨를 말렸던 만큼 크게 피해를 보았고 심하게 당한 북인이 정철을 더 괘씸하게 여겼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을 간 사람들도 풀어주어 활용하기 위한 결정들에 의해 복직되었지만, 임진왜란 중 몽진 중이었던 선조를 보필하는 과정에서도 니나노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술처먹고 긴급작전회의에 불참하는 등 막장짓을 많이 저지르는 바람에 또 미움을 샀다. 그나마 선조의 신뢰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일련의 헛짓에도 불구하고 자리는 어렵게나마 지키고 있었는데, 단 한방에 자신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짓을 저지른다. 1593년 5월에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는데, 명나라 정부에 '''[[일본군]]이 모두 철군했다'''는 초특급 거짓 문서를 올려 버린 것이다. 이것 때문에 조선 정부와 명나라 파견군에서 난리가 났고, 정철은 이 사건로 파직당했다. 결국 강화도로 낙향한 정철은 몇 달 만에 58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통상적으로는 낙향한 관리에게는 주변에서 먹을 것을 제공해 주지만 정철은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은 터라 이런 보조를 받지 못하고 굶어 죽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일도 아니고 무려 임진왜란 관련 업무에서 사고를 쳤으니 백성들이 정철을 살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일 지경이다.[* 그런데 저런 짓을 저지르고도 그저 파직만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동인의 모함 혹은 왜곡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공식 기록으로 동인 측의 <선조실록>과 서인 측의 <수정실록> 2개가 있는데 당파적으로 차이가 심하고 정철에 대해서도 그 기록에 차이가 많다.] 어쩌면 고의가 아니라 [[알코올 중독]]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알콜성 치매]] 증상으로 인해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정신병 증상에 대해서는 참작을 해줬던 관례상 파직만으로 처벌이 끝난 것도 이해가 간다. 그의 사인을 '술병'에 의함이라 하거나 정황상 '아사'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가 식량이 끊겨 영양실조로 인한 간 기능 저하 및 지병 악화로 사망한 것이라 본다면 둘 다 맞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관료로서의 무능함과 막장인 인성과는 별도로 유배지에서 굶어 죽어가며 구걸을 할 정도로 궁핍했다는 것은 그가 조선의 다른 권신들과는 달리 별로 치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정철을 무능한 인물로 평가하면서도 '간신'으로 보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정철은 부정축재에 열을 올린 탐관오리는 분명 아니었지만[* 실록에 보면 이런저런 잘못으로 여러 번 비난을 받고 탄핵당했지만 딱히 부정축재 문제로 비난을 받은 적은 없다.] 특별히 청렴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술과 여색으로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세자 건저 문제로 파직당했을 때 선조가 정철에게 '그렇게 주색에 빠져 있으니 나랏일을 엉망으로 할 수밖에 없지!'라고 화를 내기도 했을 정도. 정철의 묘는 원래 고양군(현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고양)|신원동]]에 '송강'을 기념하는 송강마을이 있다.]에 있던 것을 조선 현종 6년(1665)에 [[송시열]]이 묫자리를 정하고 후손 정양이 이장해 현재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자리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