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주영 (문단 편집) === 대북 사업 === 1992년 대선 낙선 이후 정주영과 현대는 정권에 찍혀 정치 보복이라 의심 당할 만한 일을 당하게 된다. 일단 14대 대선이 끝난 후 선거 운동을 도왔던 이들이고 [[정몽헌]], [[정몽준]] 회장과 함께 비자금 사건 때문에 수사를 받으며 모진 고초를 겪었고 직후 정치에 손을 뗐다. 이렇게 대통령 선거 낙선 이후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대북 사업으로 다시 활력을 얻기까지 침체기에 빠져 안타까움을 사게 된다. 이 무렵 현대그룹이 겪은 정치 보복이라 의심받을만한 사례 일부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 [[문민정부|김영삼 정부]]는 2년 동안 현대의 돈줄을 묶어놨는데 오직 미국계 [[시티은행]]만이 현대에 대출을 계속해 주어 숨통을 틀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로 인해 현대는 대출금이 적어서 대우와는 달리 [[1997년 외환 위기|IMF]] 때 타격이 별로 크지 않았다고 하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화위복]],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 [[세무조사]]를 대선 1년 전인 1991년 말(1,300억 원 추징. 노한 왕회장이 "그 돈 뜯기느니 출마 한 번 하겠다"라 했다고 함)에 이어 2연타로 먹였다. 2번째 조사 때는 현대 직원들이 더 보여줄 거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말할 만큼 탈탈 털렸다고. 이런 조치는 정권 내에서도 너무 과하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했으 당시 지지율이 80%에 이를 정도로 절정의 인기를 달리던 김영삼 정부 초기의 기세가 기세였던 지라 브레이크는 없었다. 그러다 1995년 [[삼성]] [[이건희]] 회장의 "기업은 2류...정치는 4류" 이른바 베이징 발언으로[* 이때 --정주영이 경계한-- 삼성이 자동차 공장을 부산에 지었는데 사실 그 지역은 자동차 공장치고는 썩 좋은 입지는 아니었다. 또 부산은 김영삼 대통령의 텃밭이었기에 당연히 정권의 입김이 들어간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이에 이건희가 순간 빡쳐서 저 발언을 한 것. 다만 이후 정부 관련자들이 격분하자 이건희도 납짝 엎드려 김영삼 대통령과도 독대하긴 한다. 사족으로 삼성은 [[불가근불가원]] 원칙으로 알려져 있긴 하다.] 반사 이익을 얻게 된다. 세무 조사에 대출 제한으로 어려운 와중에도 삼성그룹을 제치고 재계 1위 자리를 탈환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보복에 격분한 정주영은 [[김대중]]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김영삼 정부가 [[1997년 외환 위기|IMF 사태]]로 휘청이는 와중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당선에 성공하면서 정주영 역시 재기의 발걸음을 마련하게 된다. 그 결정판이 이른바 소떼 방북이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8/nwdesk/article/1773447_30723.html|정주영 회장 김대통령 예방, 방북성과 설명(뉴스데스크)]]. 사실 대북 사업은 정주영이 이전부터 구상해 오던 계획 중 하나긴 했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 회장을 맡는 등 일선에서 물러난 후 본격적으로 대북 사업에 관심을 쏟았는데 이게 DJ의 햇볕 정책과도 연동돼 시너지를 일으켜,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북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일례로 프랑스의 철학자 기 소르망은 이 소떼 방북 이벤트를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이후 여러 번 더 방북하며 호화 유람선 금강, 봉래호를 이용한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켜 11월 18일 첫 출항했다. 1999년에는 현대건설이 [[평양]]에서 체육관 건설 기공식을 가졌고 정주영 사후인 2003년에 완공한 후 [[류경정주영체육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이때 정주영 회장의 집념에 가까운 적극적인 대북 사업을 두고 정 회장이 북한에 있는 [[고향]]이 그리워 남북화해협력을 위해 저런다고 보는 의견이 많았지만 사실 일생의 대부분을 [[기업]]가로 살아온 정주영이 진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저럴 리는 없고 건설경기 퇴조와 방만한 경영 등으로 위기에 처한 현대그룹의 돌파구를 대북 사업에서 찾으려 한 '''사업가적 비전'''이 더 큰 활동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306170017168436|#]] 역사에 IF란 없다지만 정주영이 사망한 이후 지지부진해진 대북 사업을 보면 묘한 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