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주영 (문단 편집) === 대선 출마 === 1992년 2월 마침내 [[통일국민당]]을 조직하고 유명 개그맨 [[이주일]]을 영입하는 등 여러 노력 끝에 창당 한달만에 [[14대 총선]]에서 '''31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고 본인도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이 과반에 미달한 149석에 그치며 정주영의 입지는 높아졌다. 다만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 임직원과 가족을 노골적으로 동원해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고 다른 재벌의 경계도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 삼성그룹이 정주영이 당선되면 삼성의 세가 위축될까 봐[* 특히 당시 삼성은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고 있을때라 정주영이 이건희한테 사업 겹친다고 차 만들지 말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는데 이건희는 승용차는 안 만들고 트럭만 만든다고 일단 얘기는 해 놨으나 이미 자동차 산업에 진출한 이상 이대로 가다간 언제든 터질 시한폭탄 비슷한 상황이었다.] [[김영삼]]을 밀어줬고 [[삼성그룹]] 계열 신문이었던 [[중앙일보]]도 대놓고 정주영에게 불리한 기사들을 게재하며 견제했다. 심지어 메이저급 재벌은 아닌 [[조선일보]]도 김영삼에 배팅하면서 정주영을 견제하는 기사를 잇따라 내놓았다. 물론 당시 관영 매체나 마찬가지였던 [[서울신문]]과 [[KBS]]도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주류 언론 중 [[동아일보]]는 당시 연이 깊던 김대중을 밀어주는 편이었다. 결국 정주영만 붕뜬 셈. 그리고 마침내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금전 정치의 한계와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양대산맥을 넘지 못하고 낙선하고 만다.[* 사족으로 이 와중에 [[박찬종]]은 거대 세력 앞에서도 100% 개인기만으로 6.4%라는 득표율을 얻어 선전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개표 직후 정주영은 '''"당원이 1,200만 명인데 득표 수가 400만 표(정확히는 388만표 정도)라니 우리 당원들은 다 어디에 투표한 것인가"'''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김영삼이 받은 표가 1,000만 표가 조금 안 됐으며 정주영의 낮은 득표율은 예측이 됐기는 했지만 여론 조사가 제각기 달리 나왔던 이유도 있었고 13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4자 필승론" 같은 생각을 내세운 것도 과학적 여론 조사가 제대로 없어서였다. 여론 조사는 사회 전반에 대한 분석에 바탕을 둔 의미있는 표본 추출과 세련된 조사 기법 등 상당한 경력을 필요로 한다. 사실 당원이 1,200만명에 이르기는 했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억지로 불려놓은 숫자[* 현대그룹 임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동원되어 자신들의 친척, 친구, 이웃 등에게 적극적으로 입당을 권유하며 입당원서에 이름만 올려준다면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겠다고 유혹하거나 우리 사이에 매정하게 이러기냐며 인정에 호소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었다. 또한 당원수를 대외적으로 허위발표했을 가능성도 있다] 인지라 이들이 표를 제대로 줄 리는 만무했다. 그가 연고가 있는 강원도 중에서도 [[춘천시]], [[원주시]], [[횡성군]] 단 세 곳에서만 1위를 했을 뿐 다른 곳에서는 모두 양김을 넘지 못했다. 정주영은 현대 직원들이 모두 자신을 찍고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만 설득하면 실제로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특히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의 ''''[[우리가 남이가]]'''' 발언으로 인해 14대 대선은 [[초원복집 사건|유례없는 지역 감정 싸움이 되어 타격을 많이 입었다]]. 특히 당시 노태우 정권은 총선 당시 보여준 현대그룹의 조직력을 경계해 공권력을 동원하며 현대그룹 직원들의 부정선거 사례를 대대적으로 폭로했고 비자금을 폭로하는 등 현대그룹을 압박해 정주영 선거 운동 조직의 손발을 잘랐다. [[울산]] 같은 대표적인 현대그룹 강세 도시에서조차 현대의 임직원 수보다 적은 표가 나오자 정주영은 매우 분개했다고 한다. 분노한 정주영이 컴퓨터 선거 조작이라는 얘기에 혹해 선거 후 [[김대중]]을 찾아가 대선 불복 선언이라도 하자고 설득했지만[* 당시 김대중의 비서였던 장성민의 회고로는 선거 바로 다음날 새벽에 정주영이 직접 김대중의 동교동 집으로 찾아와서 선거 조작을 주장하면서 선거 무효화 투쟁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는 정주영의 이야기에 김대중은 이를 거절하고 정계 은퇴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증거가 불확실해 김대중은 동참하지 않는다. 또 대선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주영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많은 신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1차적 원인이긴 했다. 어린 시절 고생을 딛고 자수성가 했다지만 재벌 출신인 그가 얼마나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 부호가 붙었던 것이다.[* 다만 반값 아파트 공약이나 '''재벌 해체''', 무료 급식 등 당시 기준 꽤나 파격적인 공약을 많이 내놓긴 했다. 또 국가보안법 폐지나 여성부 설립 등 지금 보면 꽤나 진보적인 공약도 많이 내놓아 재벌 회장이란 이미지와 달리 꽤나 리버럴한 정주영의 이념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기업 경영에서 성공했다고 무조건 국가 운영도 잘하리란 법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