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주영 (문단 편집) === 해방 이후 사업 성장 === [Youtube(AUyZXyD-cyQ)] 1984년 1월 4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미군정]] 말기인 1947년에는 서울에서 [[건설]] 회사를 차렸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사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 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 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실행력 하난 뛰어났던 셈. 그리고 얼마 안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시기 [[주한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한 손아랫동생 [[정인영(기업인)|정인영]]의 도움으로 주한 미군 관련 공사를 거의 싹쓸이하면서 창립 10년 만에 '''전국 10대 건설사'''로 성장한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에 [[재한유엔기념공원|UN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주영은 받아들였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 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 받았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정주영의 가장 큰 시련은 바로 전후에 수주했던 [[고령교]] 공사였다. 1935년에 처음 개통됐지만 [[6.25 전쟁]] 때 폭파돼서 1953년부터 현대건설이 복구에 나섰지만 사실상 말만 복구 공사지 실제로는 신축 공사에 가까웠다. 당시 복구 비용은 5,478만 환(현재 약 547억 원)에 달했다. 더군다나 이는 당시 정부에서 발주한 공사 금액 중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금액이었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큰 공사를 한 일이 전무한 데다가 건설 장비도 부족했고 애써 박은 교각은 급류에 휘말려 사라져 버리는 사고까지 일어난 데다가 물가도 자꾸 뛰어올라 인부들에게 줄 월급마저 줄어 인부들이 파업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정주영은 '''"사업하는 사람은 첫째도 신용, 둘째도 신용"'''이라 말하며 막대한 사채를 쓰고[* 정주영은 부산에서 사업을 하며 부산의 한 젊은 여성 사채업자와 사채, 외환 거래를 했는데 그 사람과의 사이가 깊어지며 아들 하나를 얻었다. 정주영은 그 아들을 집으로 데려온 후, 더 이상 그 여성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여성이 고령교 공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주영의 사정을 듣고서 당시 돈으로 3억 환을 입금해 주고 자살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은 물론, 여기저기서 빚을 얻어 마련한 돈을 정주영에게 주고 자살했던 것이다. 영웅시대에서는 그 아들을 정몽준(드라마 속 이름은 천오국)으로 설정했다.][*일화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210|#]]], 동생 [[정순영]]의 20평짜리 기와집과 매제 [[김영주(기업인)|김영주]]의 20평짜리 집, 옛 자동차 수리 공장 자리까지 팔아가면서 그 모든 자금을 공사에 쏟아부어 1955년에 완공시켰으며[* 아산나눔재단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asan_nanum/220564531831|20년 빚을 남긴 고령교의 비밀]]과 <한국 최고 경영자 9인, 그들에게 배워라> 중 ""신뢰는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지금 사용하는 고령교 교량은 1981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이 당시 현대건설에서 지었던 교량은 2010년에 철거해서 사라지고 없다.] 그렇게 점점 사업 규모를 확장해 [[현대그룹]]을 만들어낸다. 이후 박정희 군사 정권에서도 건설 수주를 따내는데 1960년대 후반 [[소양강댐]]을 건설할 당시 박정희와 안면을 튼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정 회장은 훗날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이때 댐 설계 변경 과정의 비화를 말했다. 당시 [[한일기본조약]]의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받은 보상금을 [[소양강댐]] 건설에 사용했는데 최초 설계사인 '일본공영'이 유리한 설계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공사비를 착복할 의도가 있었으며 건설 사정에 밝지 않은 건설부가 이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콘크리트 댐 대신 사력식 댐을 주장했고 이게 실제 통과됐다는 것이다. 다만 안경모 당시 건설부 장관은 정주영 회장의 주장은 '한 마디로 [[거짓말]]'이라며 현대건설은 사력댐 방식이 결정된 후 입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 측 말이 맞는지는 오늘날엔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건설부장관(당시는 국토건설청 청장)의 주장에 관한 근거 자료가 최근 발견되었다. [[https://blog.naver.com/parksgil/223416444233]] 당시 국토건설청 소속 토목기사가 1961.2.27 ~ 1962.3.29 호주에서 수력발전소 건설에 관한 기술연수와 댐 건설현장 실무훈련을 받았는데 소양강댐과 유사한 크기(높이 116m)의 사력댐인 유컴빈댐(Eucumbene Dam) 수력발전소였고 관련 내용을 1962.5.1에 국토건설청장에게 보고하였고 당시 청장이 국장회의를 소집하여 관련 내용을 공유하였다. 당시에는 일본도 이런 큰 규모의 사력댐 건설 기술이 없었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라 국토건설청, 현대 건설을 포함한 업계 모든 관련자들이 이 내용을 모르고 콘크리트댐 건설을 주장했었지만 이 보고를 계기로 국토건설청 내부에서 사력댐 건설이 검토되었다고 한다. 아래는 보고서 내용 중 사력댐 방식의 장점에 대해 기술한 내용이다. "설계와 시공만 철저히 된다면 토암댐(사력댐)의 안전도가 결코 콘크리트댐에 뒤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었으며... 사력댐 구축에는 면밀한 축토관리가 필요할 것이나 그대신 막대한 양의 시멘트를 절약할 수 있으므로 현 국내 실정에 상응하리라고 봄." 이 외에도 사력댐 건설을 위한 계획, 조사, 수리모형시험, 각종 재료시험, 설계, 시공 관련해 습득한 자세한 방안이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국토건설청 내부 검토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와 일본에는 이런 대규모 사력댐 건설 기술이 없어 정부 부처에서 우여곡절 끝에 리스크를 안고 사력댐으로 결정하여 건설되었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과 축척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서 유럽을 돌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건립하라고 했고 난색을 표하던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이번만은 해결책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자 박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내며 "무조건 해내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아래의 일화는 대통령의 성화로 대책 없이 해외를 싸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조선소 지을 돈을 빌리고자 했던 정주영 회장의 눈물겨운 스토리라고 볼 수도 있다.(...) 정주영은 영국에서 [[바클리스]] 은행과 4,300만 달러 차관 도입을 협의했지만 은행의 최종 입장은 거절이었다. 이후 정주영은 1971년 9월에 바클리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의 회장인 롱바텀을 찾아갔다. 롱바텀의 추천서가 있으면 영국의 은행에게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유명한 [[거북선]] 이야기가 나온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다'''"라며 우리는 할 수 있으니 믿어달라고 설득해 추천서를 받아냈다. 그럼에도 바클리스 은행에서는 "배를 구매하겠다는 사람을 먼저 찾아와라. 배 주문서를 가져오면 차관을 빌려주겠다."고 얘기했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국제 물류는 항공 운송이 발달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해상 운송보다 더 막대한 양을 감당하고 있었다. 오나시스는 당시 해상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세계 최대의 해상물류를 맡고 있던 존재였다. 지금의 FEDEX와 DHL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물류왕으로 보면 된다.]의 처남인 리바노스가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26만 톤짜리 선박 수주 계약을 따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준다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리바노스도 그의 말을 듣고 조선소도 없는 사람에게 일종의 도박을 건 것이다. 정주영은 그에 대해 "나보다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보증을 서줘서 바클리스 은행에서 차관을 빌렸고 정주영은 "'''우리가 지금 조선소는 없지만 배를 계약해 주면 그걸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은 뒤 배를 만들어 주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현한 것이었다. > 그 5만 분지 지도, 그 다음에는 그 조선소 짓겠다는 백사장 사진. 그걸 들고 가서 "당신이 배를 사 주면.. 아주 얘기가 구구하고 길죠. (학생들의 작은 웃음소리) 배를 사 주면은 사 줬다는 증명을 가지고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영국 정부에서 차관을 얻어서 기계를 뭐.. 사들이고 그래서 여기서 조선소를 지어서 네 배를 만들어 줄 테니까 사라." 이런 얘기죠. (학생들의 웃음소리) 근데 어떤 사람들은 우릴 보고 엉터리냐 하지만 우리보다 더 형편없었는지 그 사람이 턱 걸려들었습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 > ---- > 정주영 회장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중앙대학교]] 강연에서 얘기한 말. 이후 정주영은 1972년에 울산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조선소 건설 과정에서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자서전에서는 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밤에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다가 길에 쌓인 자재 더미를 피하려다가 차가 전복돼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익사할 뻔한 사건을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차에서 금방 빠져나왔고 현장에 있던 직원들의 신속한 구조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길에 방치한 자재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이 다름 아닌 회장이었다는 사실을 안 직원들은 모가지가 날아갈 생각에 벌벌 떨었다고. 하지만 정주영은 되려 물이 참 시원하다고 농담을 던지며 그 직원들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울산 조선소에서 진수하는 첫 호선도 정회장이 직접 지휘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국내에 내로라 하는 선장들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서 선뜻 시운전을 안 맡으려고 해서 본인이 직접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소의 완공과 함께 [[유조선]]이 건조돼 나오는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는데 도크를 부분 완공하면 그 자리에 바로 철판을 대어 배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해서 '''도크와 배를 동시에 만든 것이다.'''[* 이 [[현대중공업|현대조선소]]의 1호 선박은 1974년 애틀랜틱 배론(Atlantic Baron)이라고 명명해 성공적으로 팔았는데 중간에 [[오일 쇼크]]가 겹쳐 환율이 불리해지자 현대조선소는 환율이 유리해질 때까지 선박을 내놓지 않겠다고 했고 바이어였던 노스 오션 쉽핑社는 이를 속박으로 여겨 영국 법원에 제소해 사건명 'The Atlantic Baron'으로 알려져 있다.] 서산 간척지 공사 당시 특유의 뻘 지형으로 인해 매립이 잘 안 되자 큰 폐유조선 두 척을 착저시켜 둑으로 이용해 매립 공사를 한 후 폐선을 분해해 판매한 정주영식 공법으로 유명하다. 이 공법은 나중에 서해에서 조수간만으로 인해 방조제 막바지 공사가 지연됐을 때[* '정주영 공법'이라고 널리 알려진 건 이쪽이다.]나 홍수 시 긴급 제방을 만들 때 등으로 응용됐다. [[현대 알파 엔진|알파 엔진]]을 개발할 때의 일화도 유명한데 [[미쓰비시 그룹|미쓰비시]]의 구보 회장이 로얄티 반값 할인을 조건으로 연구소를 닫으라고 요청했을 때 성공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여 결국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개발 엔진인 알파 엔진이 탄생했다. 이런 조건을 내거는 걸 보니 분명히 해 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후일 밝힌 바 있다. 당시는 [[석유 파동]]으로 인해 중동에 돈이 엄청나게 몰린 상태였다. 그래서 한국의 건설사들은 과감하게 중동 시장에 진출했는데 그 선두에는 현대건설이 있었다. 타국 건설사들이 합리적으로 100만 달러를 입찰하면 현대건설은 절반도 안 되는 40만, 30만 달러를 적어내는 식으로 공사를 따냈다. 결과물도 선진국의 건설사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공사를 맡게 됐고 이 오일머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크게 도약시켰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공사는 수주 금액이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예산의 25%에 달할 정도로 대형 공사였다. 정주영은 공사비를 아끼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든 기자재를 마련해 바지선에 실어서 주베일까지 옮기기로 결정했다. 쉽게 생각하면 커다란 뗏목에 기자재들을 나누어 담고 앞에서 큰 배가 끌면서 12,000km를 달려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태풍이 자주 부는 필리핀 해협, 인도양, 걸프만 등에서 얼마든지 난파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천운으로 이 계획이 잘 실행됐다. 일이 잘못 됐으면 현대그룹은 없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산업 진출, 조선소 건설, 주베일산업항 건설 등 정주영 회장은 사운을 걸고 이루어 낸 일이 많다. 군사정권의 의뢰를 받은 것도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정주영이 그만큼 일을 잘했다는 소리기도 하다.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일등 공신으로도 유명하다.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올림픽]] 유치 의지는 있었으나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당시 경쟁 도시가 경쟁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일본]]의 [[나고야시|나고야]]라 거의 [[포기]] 상태였는데[* 총 79표 중 한국이 확실하게 확보했다고 본 표는 한국, 미국, 대만 단 세 표뿐이었다고 한다.], 이에 정부 관계자들도 나중에 본인들이 책임을 뒤집어쓸까 봐 적극적으로 나서길 꺼려서 당시 88 올림픽 유치 위원회 위원장이자 [[전경련]] 회장이던 정주영이 유치의 최전선에 서서 싸웠는데 이때 나고야 올림픽 유치 위원회에서는 비싼 [[시계]]를 IOC 위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유치 홍보를 했다. 이에 정주영은 IOC 위원들이 머무는 숙소에 '''[[꽃]]바구니'''만을 돌리면서 홍보를 했다. 승산이 없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막상 다음날 리셉션에서 각국 IOC 위원들은 시계보다 꽃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꽃을 좋아하는 IOC 위원 부인들이 남편을 구워삶았다는 [[카더라]]가 있다.] 한국 측 유치단에 관심을 보여서 일본 측이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주영은 물량보다는 성의로써 친밀해지자며 과감히 밀어붙였고[* 그 외 논리적 설득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는 일본 안 그래도 지금 경제 대국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더 밀어주면 안 된다는 식으로 개도국에는 니들도 언젠간 올림픽 유치해야 될 텐데 지금 한국 같은 개도국에 밀어주면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식으로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최종 투표에서는 서울이 나고야를 52-27로 누르고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에 성공했다. 1987년 정주영은 명예 회장으로 사실상 경영에서 한발 물러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