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주영 (문단 편집) === 성장기와 사업 초기 ===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현재는 [[북한]] 관할이며 현행 행정구역상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노상리)에 속한다.]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의 슬하 6남 1녀 중 첫째이자 집안의 장남이자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고향 마을 아산리의 이름을 딴 '아산(峨山)'. 현대그룹이 전국 곳곳에 세운 [[아산의료원]]도,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앞 태화강을 따라 동구와 북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아산로(울산)|아산로]] 역시 바로 이 호를 딴 이름이다. 이것을 보고 [[충청남도]] [[아산시|아산(牙山)시]]에서 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충남 아산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인주면]]에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이 있긴 하다.]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즉,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다만 이 초졸 학력은 약간의 오해가 있는데 당시는 초등 [[의무교육]]이 없고 보통교육 개념도 희미할 때라[* [[서당]]이 아직 굴러가고 있던 시절이다. 한편으론 친일 교육을 시킬까 거부감이 든 점도 있었을 것이다.] 정주영이 초등학생일 때 [[보통학교]] 취학률은 채 20%도 안 되던 시절이라[* 보통학교 취학률은 1920년 3.9%, 1935년 20%였고 1943년 [[국민학교]] 취학률은 60%였다. 초등 의무 교육이 처음 실시된 것은 해방 후인 1950년이었다. 1929년 기준, [[조선인]]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19.9%밖에 되지 않았으며 한반도에 거주하는 내지인(일본인)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99%에 달했던 것과 극히 대조된다.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17596651|'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일제시대의 문맹률 추이)' 노영택, 국사관 논총 51권(1994), 국사편찬위원회]], 115p. 출처.] 학력 인플레가 심하게 일어난 2000년대 이후는 물론, 그래도 고등학교는 보내려고 했던 20세기 후반과도 괴리가 있다. 즉, 이를 고려하면 정주영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준 상위 20% 정도의 교육은 받았던 셈이다. 최소한 비율만 따졌을 때 2022년 기준 고졸은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한 [[대학]] 학력과도 비견할 만한 수준이 된다. 그럼에도 정주영의 학력이 자꾸 부각되는 것은 집안이 엄청 잘 사는 집안은 아니었고[* 학교까지 다닐 여건이면 완전히 거지 집안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애초에 정주영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공부를 해서 학력을 올리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본인이 하기 싫다고 안 한 케이스에 가깝다. 다만 농업 역시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아버지가 대학을 나와도 실업자가 된다고 가업을 장남에게 상속하고 책임을 지우려고 했는데 그게 싫어서 여러 번 가출했던 것. 특히 가출 이후 [[막노동]]까지 하면서 밑바닥부터 올라온게 오늘날 자수성가했다고 평가받는 요인이다.], 다른 많은 재벌가 총수보단 학력이 처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애초에 초졸이란 학력은 당시 시대상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거지 절대치로는 일반인들도 알다시피 여전히 글만 겨우 깨우쳤을까 말까한 수준으로 사업하기 좋은 환경은 결코 아니었다. 결국 정주영이 사업 스킬을 익히는 건 이후의 사회 생활과 학원 등에서 익혔다고 봐야 합리적일 것이며 역설적으로 초졸만 하고 청소년기에 빠르게 사회에 진출했기 때문에 더 젊은 나이에 성공한 점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도박]] 비슷한 인생은 [[모 아니면 도]]인지라 정주영처럼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LG]]의 [[구인회(기업인)|구인회]] 회장의 경우 엄밀히 따지면 정주영과 학력이 같지만 그래도 고등보통학교 3학년 중퇴라 고졸로 쳐주는 느낌이고[* 오늘날에는 [[초대졸]]급([[전문학사]] 혹은 4년제 대학 2년 이상 재학생) 아니면 대학에 입학한 사람도 [[자퇴]]하면 그냥 고졸로 친다. 하지만 1970, 1980년대만 해도 자퇴 또한 그 이전 학력보다 더 나은 학력으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가령 [[이명박]]만 해도 '대학 중퇴'라는 스펙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대학에 입학했던 경우였다.] 무엇보다 집안이 이름높은 [[양반]]가였다. 또한 [[롯데]] [[신격호]] 회장도 고등보통학교까지 다녔고[* 다만 성적은 낮았다고 한다.], 한 세대 아래이긴 하지만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연세대학교]] 출신이다.[* 심지어 김우중의 경우에는 당대 최고의 명문고였던 [[경기고등학교]] 출신인데 여긴 애초에 [[서울대학교]]는 기본으로 가는 루트였다. 다만 김우중은 경기고 재학 시절 반에서 '''꼴찌'''를 했을 정도로 공부를 안하고 학교 주먹패로 이름을 날렸던지라, 그나마(?) 연세대학교에 갔던 것이다.] 특히 라이벌로 자주 비교되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퇴라지만[* 이병철 스스로 공부와는 크게 연이 없다고 할만큼 진득하게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젊은 시절 한동안은 도박에 빠지기도 했다.] 도일해 [[와세다대학]] 정문을 밟아봤는데 이 시대 기준으로는 대학 중퇴도 어마어마한 스펙이다. 당대 조선인 입장에서는 최상위권 스펙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이병철과 재계 1, 2위를 다투니 호사가들 사이에서 자연히 '초졸 대 대졸'[* 하지만 정작 이병철 회장은 단 한 번도 졸업장을 받은 적이 없다. 보통학교, 중학교, 대학까지 모두 중퇴했다.]식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정주영이 초등학교만 졸업한 반면 동생들의 학력은 좋은 편이다. 둘째 동생 [[정인영(기업인)|정인영]]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중퇴, 넷째 동생 [[정세영]]은 [[고려대학교]]를, 막내 [[정상영]]은 [[동국대학교]]를 각각 졸업했다. 요절한 다섯째 동생 [[정신영]]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퇴사 후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유학 중 [[장폐색|장폐색증]]으로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아버지 [[정봉식]]은 장남인 정주영이 훌륭한 농사꾼이 되어 가족을 잘 부양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가 어린 나이 때부터 일을 쎄게 시켰던 것 같다. 정주영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농사일에 학을 떼 그만 집안의 돈을 훔쳐서 [[가출]]한 적도 여러 번 있는데, 한 번은 부친이 '''[[소]]를 판''' 70원을 갖고 가출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후에 소 떼를 몰고 방북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원래 소 한 마리에 이자를 1,000배로 쳐서 두 차례에 걸쳐 총 1,001마리를 올려 보냈는데 이때 1,000마리가 아닌 1마리 더 보낸 이유는 나중에 999마리를 보낼지도 모르니 일종의 명분 쌓기였다는 얘기도 있다. 여담으로 이후 얘기가 나온 바로는 모두 암소인 데다가 새끼를 밴 소여서 정확히는 1,001마리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첫 번째는 [[함경북도]] [[청진시|청진]]으로 갔다고 한다. 하지만 차비가 없어서 [[원산시|원산]] 근처의 고원군에 도착했다가 마침 그곳 탄광촌 근처에서 [[철도]] 공사가 한창이어서 [[막노동]]을 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금강산]]이었으나 일도 못 구하고 [[사기]]만 당하고 아버지에 끌려왔다. 세 번째는 상기한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서 서울로 가서 [[주산]], 부기([[경리]]업무)[[학원]]에 등록했으나 또다시 아버지에게 잡혀 끌려왔다.(...) 이때 아버지는 [[레디메이드 인생|"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 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 와서 보면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면 지금의 현대도 없었겠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네 번째는 소학교 친구 중에 부농의 아들이었던 오인보와 같이 가출했으나 '''또''' 끌려왔다. 이후 오인보는 나중에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멤버가 된다. 허나 이후 다시 가출해(...) 인천 부둣가에서 막노동 일을 해 돈을 벌며[* 여기서 후술된 '[[빈대]]' 일화가 등장한다.] 서울에 정착했다. [[성북구]] [[고려대학교]] 본관 공사장, [[용산역]] 근처 풍전 엿 공장(현재의 [[오리온(기업)|오리온]])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고 한다. 1930년대 [[신당동]]의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에서 '''[[쌀]] 배달 점원'''으로 일하다가 당시 [[노름]]에 빠진 외아들[* 그 시대의 부잣집 자제들 중에는 [[일제강점기|시대적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사냥, 도박, 주색으로 소일했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드라마 미스터선샤인 조선 갑부 김희성(변요한)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항일을 하자니 몸이 고단할 거 같고 친일을 하자니 마음이 고단할 거 같고 난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당장 삼성을 일군 이병철 회장도 젊은 시절 도박에 꽤나 빠져들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다만 하루는 밤에 귀가했는데 어린 자식들이 자는거 보고 내가 이러면 안되지 하고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사냥을 좋아하는 일부 사냥꾼들은 당시 한반도에서 구하기 힘든 값비싼 [[윈체스터(총기회사)|윈체스터]] [[윈체스터 소총|라이플]] 소총을 구입해서 사냥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혹은 [[김용환(1887)|김용환]]처럼 노름꾼을 위장해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청년 정주영의 성장에 의도치 않게 도움을 준 이 복흥상회 외아들이 어느 부류를 택했을지는 모를 일이다.]에게 실망한 쌀가게 주인이 성실하게 일해온 정주영에게 걍 니가 이 가게 사라고 '''가게를 매도'''해 3년 후 쌀가게 '경일상회'를 차렸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제국|일제]]가 쌀 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자연스레 문을 닫았다.(...) 이후 현재의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했다. 이 중에는 [[윤덕영]],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기업인)|박흥식]]의 차도 있었다. 때문에 후일 아도 서비스에 불이 나 입고 됐던 차들이 모두 타 버렸을 때 정주영이 윤덕영의 자택인 벽수산장과 조선총독부에 직접 찾아다니며 차값을 갚겠으니 시간을 달라고 빌러다녔다고 한다. 박흥식은 자신을 찾아온 정주영에게 [[화신백화점]]이 전소됐다 재건했던 이야기와 사업상의 조언을 해주며 격려를 해 줬다고 한다. 그리고 박흥식은 오히려 화신백화점의 자동차는 모두 정주영의 공장으로 보내 수리하도록 배려했다. 아도 서비스 화재로 건물과 수리 중인 자동차들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을 때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 재기에 성공한 정주영은 자리를 동쪽으로 옮겨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의 작은 공터에서 다시 자동차 정비소를 열게 된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는데 정주영이 쌀가게를 하면서 알게 된 후원인 오윤근은 사람 보는 눈이 좋아 돈을 빌려주고 떼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허나 처음 그에게 빌린 돈으로 세운 공장이 날아가자 정주영이 그를 찾아가 다시 돈을 빌려달라면서 "여기서 내게 빌려준 돈을 떼이면 당신 이력에 흠이 생기지만 다시 빌려주면 그 돈으로 재기해서 갚겠다"고 했다. 이 말에 후원인도 자신이 돈을 떼인 적이 없다는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돈을 빌려 줘야겠다고 하며 선뜻 빌려줬고 정주영은 약속대로 돈을 갚았다. 둘 다 보통내기는 아니었던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