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명 (문단 편집) === 옥고, 그리고 이후의 행적 === 1930년, 정종명의 외아들 박홍제가 '무서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배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천 소념감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그녀는 1931년 4월 [[조선공산당]] 재건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8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그녀는 1932년 10월부터 취조를 받았고, 1934년 3월 공판에 참석했다. 그녀는 김문수와 함께 주도자로서 매번 기사의 제목이나 사진을 장식했다. 일제는 그녀로부터 전향서를 받아내기 위해 갖은 고문을 가했고, 결국 그녀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전향서를 작성했다. 이 전향서는 1934년 5월 2일자 <매일신보>에 '옥(獄)의 투철(透徹)한 자각은 과거의 오류(誤謬)를 청산'이라는 기사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후 그녀는 4년형을 구형받았다가 6월 25일 징역 3년형을 최종적으로 언도받았다. 1935년 7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그녀는 경성에서 산파 일에 전념하며 조용히 지내다 [[8.15 광복]] 후 1945년 12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부녀총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그러다 북한으로 넘어가 함경남도 대표 자격으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47년에는 [[함흥]]에서 부인 운동을 펼쳤고, 1948년 북조선민주여성동맹 [[간부]]로 활동했다. [[북조선]]민주여성동맹은 조직을 이용해 북한 [[공산]]세력의 권력을 강화하고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