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명 (문단 편집) === 공산주의 및 여성 활동 === 그녀는 여성의 무산계급론을 강조하면서 1923년 6월 블라디보스톡에 설치된 [[소련]] [[코민테른]]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의 국내조직인 꼬르뷰로 국내부의 공산청년회에 가입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당시 그녀는 유일한 여성 공산청년회 회원이었다. 본격적인 [[조선공산당]] 자부를 조직하기 위한 길을 걸었다. 그녀는 1923년 여름부터 전국 각지에 대중 강연을 벌여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1924년 2월 18일에서 3월 24일까지 40일 동안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의 약 21개 지역에서 연일 강연을 벌여 총 수입을 1,634원 30전이나 벌어들었다. 정종명의 대중강연 주제는 주로 여성문제에 관한 것으로,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조선 여성의 현실을 짚어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용을 열정적인 스타일로 전달하여 커다란 인기를 끌었고, 당시의 대표적 대중연설가 중 한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듯 대중강연에서 맹활약한 그녀는 곧 유명인사가 되었다. 1924년 일간지 [[조선일보]]에서는 '여자고학생의 본영 여자고학생상조회-주장 되는 정종명 여사'라는 기사에서 정종명의 활약을 칭송했으며, 그녀의 곰보자국까지도 "진실로 보기 좋게 스멀스멀 슬기 있게 얽은 얼굴"이라고 호평했다. 게다가 이 기사에 실린 정종명의 사진은 [[크리스마스]]의 유래와 의미에 대한 기사, 그리고 아기 [[예수]]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과 나란히 배치되었다. 1924년 1월, 정종명은 조선간호부협회를 창립했다. 조선간호부협회는 조선인 간호부들의 단체로, 회원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구직 알선 등을 했고, 동시에 대중을 대상으로 보건 교육을 개최했으며, 수해 등의 재난 상황에서는 다른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구호를 제공하는 등 폭넓은 사회 활동을 수행했다. 1926년 12월 세브란스병원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그녀는 진상을 파악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만약 병원 측이 중재에 응하지 않을 경우 “형편에 따라서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동시에 조선의 직업부인을 위하여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의 내면생활을 세상에 폭로하여 적극적으로 대항할 방침”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1924년 5월 10일, 정종명은 사회주의 단체인 여성동우회 발기 총회에 참석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여성동우회에서 각 지방에 배포하려던 선언물이 불허되자 경찰에 항의하기도 했고, 1926년 신년간친회에서는 여성 활동 1년사를 보고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1927년 고등여학교 졸업 이상 지식계급의 여자만의 모임이었던 망월구락부가 다른 여성들 역시 참여시키기로 하고 확장을 꾀할 때, 그녀는 발기인으로 자원하기도 했다. 여성 공산당원으로써 관련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4년 11월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풍회에 참여하고, 북풍회의 월간 사상잡지 ‘해방운동’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북풍회를 비롯한 4개 [[공산주의]] 활동 단체가 합동으로 결성한 ‘정우회’가 결성되자 여기에도 참여하고 상무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리고 1927년 2월 좌우 합작의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될 때에도 함께 하였다. 정종명은 1929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데 이어 1930년에는 [[신간회]]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5월 27일, 정종명은 근우회 창립총회에 참석해 중앙 집행위원 21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선전조직부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해 9월에 상무집행위원이 되었고, 1927년 11월 전남 목포에 직접 가서 근우회 지회에 관해 조사했다. 또한 1928년 종로경찰서가 근우회 전국대회를 금지시키자 경찰과 교섭하기도 했고, 1928년 7월에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그녀는 지방에서 검거된 독립운동가들이 징역을 살기 위해 경성에 도착하면 마중 나와서 격려하고[* 임원근, '옥중기', <삼천리>, 1930],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판장에 방청객으로 나서서 격려했다.[* '철통같은 경계 살도(殺到)하는 군중', <매일신보>, 1927년 9월 14일자 기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면서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인물들을 추운 초봄에 창밖에서 몇시간이고 지켜보는 것으로 위로했으며, 때로는 이러한 자리에 아들 박홍제까지 데리고 오기도 했다고 한다.[* 김일성, '감옥에서 보든 여성', <혜성>, 1931] 그리고 붉은 철쭉꽃을 들고 기다리다가 수감자와 눈이 마주치면 노래를 부르며 위로했다고 한다.[* 김경재, '옥중생활 로맨스', <삼천리>, 1932] 또한 형무소에서 구금된 인물의 건강 문제가 심각할 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중간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약수]] 옥중 발병 의사가 왕진', <매일신보>, 1927년 6월 24일자 기사] 그녀는 독립운동가들의 장례도 앞장서서 치루곤 했다. 일본 유학생으로서 국내 강연회 도중 사망한 정우영의 사망 1주기에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했고, 1925년 8월에는 서울 송파에서 익사한 사회주의 운동가 전일[*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일(1893)]], [[전일(1896)]]과 동명이인이다.]의 장례를 주도했다. 또한 1928년 1월 35개 단체가 연합하여 준비한 여성운동가 박원희의 사회단체장에 준비위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면서, 박원희의 사망은 “여성운동의 큰 손실”이라는 인터뷰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영결식에서는 “눈물 섞인 애도사”를 낭독하였다. 1929년 이정수의 장의에는 재정부장으로 나섰으며, 1930년 [[이승훈(1864)|이승훈]] 사망 후 사회장을 치를 때 준비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1930년, 정종명은 <삼천리>에 '동지 채 그리그리 선생'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 따르면, 그녀는 러시아 국적의 사회주의 운동가 채 그리고리가 조선에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먼발치에서 목례로 첫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일면식도 없던 채 그리고리가 이후 3년간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면회를 하며 위로하다가 결핵 말기로 입원했을 때는 수차례 병문안하며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을 지켜보았다. 정종명은 “제3기 폐병이라 하야호흡이 자못 곤란해 보였다. 그날 맥박은 130으로부터 140도까지 쳤었고 신열도 40도를 상하 하였으니 이미 여간히 중태인 것이 아니다”고 회고했다. 극도로 쇠약해진 채 그리고리가 1930년 4월 30일 숨지던 날, 원하는 사이다를 사다주는 것 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다가 임종을 맞이하자 국내에 친인척이 단 한명도 없는 그를 위하여 앞장서서 장례를 치루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