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명 (문단 편집) === 간호부 활동 === 정종명은 1917년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에 입학했다. 그녀는 재학 중에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곧 여학생들의 리더가 되었다. 그녀는 대우 개선 문제를 놓고 학생 20명을 선동시켜 동맹휴학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녀는 1920년 여성지 <신여자>에 '간호부 생활'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녀는 먼저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기숙사, 그리고 간호부의 일에 관하여 소개하였다. 이어 ‘기침과 식사’ ‘주간직무’ ‘야간의 로맨스’로 나누어 하루의 시작에서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일과를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정종명은 서양식으로 잘 갖추어진 기숙사, 식당, 병원의 환경, 동료간의 각별한 애정과 신뢰, 그리고 미리 계획된 일정에 따라움직이는 나날에 대하여 자못 자랑스러운 어투로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렇지만 간호부로써의 일 자체에 대해서는 “혹 상당한 학력 있는 사람으로 이 뜬 세상 거친 물결에 헤메이고 울다가 할 수 없이 자선사업인 간호부생활에 들어온 사람이 많으며”, 간호직에 대하여 “어떠한 나라에서는 존경을 받고 어떠한나라에서는 멸시를 받는 신산하다면 신산하고 고상하다면 고상하다고 할 직업”인데 “정신이나 육체 두가지로 다 노동하는 직업”이라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병원의 규칙은 다른 데와 달라서 상하지별과 규칙이 엄중하옵니다. 그리하여 병실 안에서는 부장과 의사가 시키는 대로 명령을 맞추며 구구이 학과를 공부하는 터이니까 시간이 여간 총총하지 않습니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정종명이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에서 공부하던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생했다. 세브란스병원에서도 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3월 5일 오전 남대문정거장 앞 광장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대 가운데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11명이 붕대를 휴대하고 군중 속에 섞여 있다 체포되기도 했다. 정종명은 이 시기 3.1 운동 주동자들을 도와주었다.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에 재학하던 [[강기덕]]이 [[민족대표 33인]]과 연결되어 만세운동 계획을 지시받고 학생들의 시위 참여에 대한 연락책임을 받아 학생들을 규합하다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녀는은 강기덕이 외부와 원활히 연락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당시 세브란스 병원 제약주임이자 삼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명인 [[이갑성]]의 기밀서류를 맡았다가 경찰서에 잡혀 며칠간 취조받기도 했다. 정종명 본인은 며칠간 취조받는 선에서 그쳤지만, 어머니 [[박정선(1874)|박정선]]은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북감리회 전도사였던 박정선은 [[전협]] 등이 이끄는 대동단에 가입한 뒤 1919년 11월 28일 대동단 동료들과 함께 경성 안둑동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종명은 1920년 <신여자>에 기고한 '간호부 생활'에서 어머니에 대해 "어떤 사람은 그 무슨 일로 철창 속에 갇혀 있는 부모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고"라며 자신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