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조(조선)/가계 (문단 편집) == 20년 간의 짝사랑([[1766년]]~[[1786년]]) == 정조가 26살이던 [[1778년]](정조 2년), 왕대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가 [[후궁]] 간택령을 내리면서 정조는 궁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 간택령으로 간택된 후궁이 바로 [[홍국영]]의 [[원빈 홍씨|여동생]]이다. >"대궐(大闕) 안에 있는 궁인(宮人)을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정조(조선)|주상]](主上)의 본래부터의 성념(聖念)이 미천(微賤)한 처지의 사람에게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1778년]], 정순왕후의 후궁 간택령(조선 왕조 실록)] > "빈([[의빈 성씨|의빈]])을 후정([[후궁]])의 반열에 둔지 지금까지 20년이다." > 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 >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1&fcs=&fcsd=&cf=&cd=&gb=&aa10up=kh2_je_a_vsu_25102_000&aa10no=kh2_je_a_vsu_25102_001&aa15no=001&aa20no=25102_001_0002&gnd1=&gnd2=&keywords=&rowcount=10|#]] 앞서 여러 기록에 나오듯 [[정조(조선)|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은 왕이었다. 그런데 순애보적인 모습도 보이는데,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그 일화가 전한다. [[1766년]](영조 42년), 정조는 15살이던 당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풍산 홍씨|친정집]] 청지기의 딸이자 처소 궁녀였던 [[의빈 성씨|나인 성덕임]](당시 14세)에게 [[성관계|승은]](왕 또는 왕세자가 궁녀와 합방하는 것)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세손빈]](당시 14세)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울면서 못한다고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맞는 말이라 [[정조(조선)|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다시 재촉하지 않았다. 당시 실록이나 일기에 이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 일은 오랫동안 비밀로 한 것 같은데, 아버지 [[사도세자]]가 궁녀들을 가까이해서 할아버지 [[영조]]의 눈밖에 나 죽기까지 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첫날밤|초야]]를 막 치른 젊은 [[정조(조선)|세손]]이 [[사도세자|세자]]와 같은 비행을 저지른다고 [[영조]]의 눈밖에 날 우려가 있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정조(조선)|정조]]도 즉위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이후 [[조선/왕사|후사]](後嗣) 문제 때문에 15년 동안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뽑았고 다시 [[의빈 성씨|의빈]]에게 [[성관계|승은]]을 명하였지만 또 사양했다. 또 사양한 이유는 안 나와 있다. 그러자 [[정조(조선)|정조]]가 [[의빈 성씨|의빈]]의 사속(私束, 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성관계|명]](승은)을 따랐다고 한다.[*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정조가 15년이나 기다려 취할 정도면 [[의빈 성씨]]는 상당히 재색(材色, 미모를 갖추다)[* "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 정조 《어제의빈묘지명》]을 갖춘 [[후궁|여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조(조선)|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여홍(=여공, 바느질·자수)에 민첩하고, [[요리]]도 잘하고, [[서예|붓글씨]]도 범상치 않고[* 실제로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전10권에 달하는 고전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기도 했다.], [[수학]]도 잘했다고 한다. [[의빈 성씨]]는 [[정조(조선)|정조]]에게 대단한 총애를 받아서 연년으로 유산 2번, [[문효세자]], 딸 하나를 낳지만 딸은 옹주 책봉되기도 전에 요절해 죽었다. 거기다 [[의빈 성씨]]는 만삭인 상태에서 [[문효세자]]를 잃고 슬퍼하다 사망해 마지막 아이 또한 복중 사망한다. 5년간 5번의 [[임신]]은 [[정조(조선)|정조]]가 그만큼이나 [[의빈 성씨|의빈]]을 매우 총애했다는 뜻이다. [[정조(조선)|정조]]는 [[의빈 성씨]]와 그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효창원)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문효세자]]가 먼저 죽고 뒤이어 [[의빈 성씨]]가 죽었는데 [[정조(조선)|정조]]는 모자(母子)가 함께 있으라고 [[의빈 성씨]]를 아들 [[문효세자]] 옆에 묻어줬다. 참고로 아무리 친모여도 [[후궁]]이 [[왕세자|세자]] 옆에 묻히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정조가 기존 규례를 깨고 배려해 준 모양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서울특별시|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72XXXXXX8944|서울 지명 사전]] 여담이지만 [[숙종(조선)|숙종]] - [[영조]] - [[사도세자]] - [[정조(조선)|정조]]에 이르기까지 4대 째 웃전의 궁녀에게 반했다. 숙종은 증조모 [[장렬왕후]] 처소의 궁녀였던 [[희빈 장씨]]에게,[* [[숙빈 최씨]]는 웃전 소속은 아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각각 법모/조모인 [[인원왕후]] 처소의 궁녀였던 [[영빈 이씨]], [[경빈 박씨(장조)|경빈 박씨]]에게, 정조는 [[혜경궁 홍씨|어머니]] 처소의 [[의빈 성씨|궁녀]]에게 반해 후궁으로 삼았고 [[문효세자|아들]]을 얻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