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조(조선) (문단 편집) === 술과 담배 사랑 === 어릴 적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술]]과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술]]의 경우, 자주 마시지는 않고 어쩌다가 한 번씩 마시는 정도였는데, 그 어쩌다가 먹는 술이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마셨고 한다. 진짜 문제는 [[술버릇]]이 매우 고약했다는 점인데, 정조의 술버릇은 '''[[술 강요|신하들에게 억지로 술 먹이기]]'''였다고 한다. 현대에서는 꼰대소리 듣기 딱 좋은 최악의 술버릇을 가진 셈이다. '''하물며 군주제 국가의 왕이 내리는 술이라 거절도 못하는데, 신하들이 곤혹스러워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허허, 이걸 안 받으면 [[사약|다른 걸]] 받게 될 것이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2082642580EFF0F0E.jpg|width=100%]]}}} || || {{{#gold ''' 술마시는 정조 동상. 해당 동상은 팔달문시장 도보 정리로 근처로 이동했다. '''}}} ||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의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 불취무귀(不醉無歸),[* 시경 <잠로>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러니까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만, 이는 진짜로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이다...만 정조는 이 글귀를 신하들에게 '''매우 철저하게 적용한 왕이었다.''' [[선비]]들도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정약용]] 같은 문약한 선비들을 하루 종일 손이 부러져라 [[활]] 쏘기를 시킬 정도로 가혹했던 인물이다.[* 이미 이 시기면 [[조선]]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건간에 활은 전쟁터에서 쓸데가 없어서 활쏘기 장려는 군사적으로는 별 의미없는 짓이었다. 허나, 활을 당기는데 힘이 상당히 들어가므로 정조가 직접 사대부나 왕족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체력을 기르기 위한 [[스포츠]]로서 활쏘기를 적극 장려하고 본인도 이를 즐겼다. 애초에 활은 6예라 하여 선비가 갖춰야 할 6가지 미덕 중 하나이기도 했고 실제로도 활을 잘 쏘려면 집중력도 필요했다. 군사적으로만 필요없을 뿐 한반도에 들끓는 맹수들 상대하려면 활이라도 있어야 했다.] 정약용에게는 이외에도 [[술]]을 옥으로 만든 필통에 부어 마시라고 종용했을 정도였는데 정약용이 속으로 나는 죽었다고 복창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정약용에게 왕이 직접 삼중소주(三重燒酒)를 하사했다고 하는데 물을 타지 않은 원액이 '''최소한 70도 이상'''의 도수를 가지는 매우 독한 술이다. [[성균관]] 제술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들을 불러다가 [[희정당|창덕궁 희정당]]에서 연회를 벌이고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 조금만 현대식으로 번안하면 "옛 사람들은 술로 취하게 하고 그 사람의 덕을 살펴본다. 오늘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생각하지 말고 실컷들 마셔라. 신기 넌 술자리 자주 해봤으니 알지? 잔 돌려. 내각과 정원, 호조는 술 좀 많이 갖고오고 팔환은배(약 220ml잔)을 쓰되 노인들은 작은 잔, 젊은이는 큰 잔을 써라. 태혁이하고 영보는 술잔 돌리는거 잘 보고 누가 뺑끼 안치나 감시해라." --요새 술자리에서 한 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이 자리에는 오태증이라는, 집안 대대로 [[주당]]으로 이름난 유생이 있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오도일이 [[숙종(조선)|숙종]] 대에 여기 [[창덕궁 희정당|희정당]]에서 술에 취해 넘어졌다면서,[* 아마도 숙종 23년의 기사로 보이는데 이 때에 왕이 사단에 나아가 기도를 올렸는데 이 때 오도일이 술에 취해 넘어져 음복주를 엎질렀고 그로 인해 파직당했다고 한다.] 술 5잔을 더 먹여 결국 취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오도일이 여기서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지금 그의 후손이 같은 장소에서 취해 쓰러진 것이 우연이 아니다"라며 흐뭇해했다. 여하튼 그토록 술을 좋아하다보니까 사회적 분위기도 같이 따라가서 수도 한양에 술집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다보니까 당대에는 상당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서 사대부들이 술집을 없애자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한 번은 [[창덕궁 부용정#s-5|부용지]]에서 낚시를 한적이 있었는데 [[채제공]], [[심환지]], 남공철, [[서유구]], 이가환, 이상황,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성해응 등 각 정파별로 터줏대감부터 새내기까지 줄줄이 거느리고 했다. 고기를 제대로 못 잡은 사람에게는 [[술]]을 내렸다. >[[훈련도감]]이 아뢰기를, "지난밤에 흰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궁궐의 담장 아래에서 술에 취하여 누워 있기에 호패(號牌)를 상고해 보니 진사 이정용(李正容)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마침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술]]을 마시고 나서 야금시간에 걸린 줄을 몰랐다고 하였는데, 법에 따라 형조로 넘겼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성균관]] 근처의 민가는 집춘영(集春營) 건물과 지붕이 서로 잇닿아 있으니 야금시간을 범하였다고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나 유생들을 물론하고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의 풍류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 유생은 술의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스럽다. 군향(軍餉)을 맡은 고을에서 주채미(洒債米) 한 포대를 주어, 술을 주어 취하게 하고 취한 중에서 덕을 관찰하는 뜻을 보여주라." 하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004012_001|《정조실록》 44권, 1796년(정조 20년) 4월 12일 정해 1번째 기사.]] 어느 날은 한 선비가 술에 취한 채 '''궁궐 담벼락 밑에서 밤에 잠을 자다가''' 야간 통행금지에 걸려서 잡혀온 일이 있었다. 그러자 정조는 '요즘 사람들은 [[술]]이 약해서 제대로 마실 줄을 모르는데 이 자는 술을 잘 마셔서 그 멋을 아니 참으로 가상하다. 상으로 쌀 한 포대를 주고 풀어줘라.'라고 명을 내렸다. 다만 [[야사(역사)|야사]]에 따르면 [[조선]]은 [[술]]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였다고 한다. [[높으신 분들]]부터 천민들까지, 한 번 마시면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게 기본이라 생각할 정도다. 일단 둘러앉아 작정하고 마시기 시작하면, 안주도 거의 안 먹으면서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술상에 그대로 엎어지거나, 술 가지러 가다가 술상 근처에서 쓰러져 잠들기 일쑤인데, 이렇게 아침까지 바닥에서 자다 깨서 영의정은 나랏일 보러 가고, 농부들은 농사 지으러 갔다고 한다. 아무도 [[영의정]] 급이 술에 취해 아침까지 널브러져 자는 걸 뭐라고 하지 않았다.[* 서양에서도 비슷했는데 [[영국]]만 해도 [[럼]]과 [[진]]으로 거리에 술주정뱅이들이 넘쳐날 정도였다. 미국은 아얘 술을 너무 마셔서 외국인의 기록에서도 미국인들이 술 없으면 사회에서 뭐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겠냐? 식의 기록도 있고 노동자들은 일요일에 마신 술로 인한 숙취로 월요일에 직장에 나오지 않아도 사장들이 이해해줬다.][* 열하일기에서도 박지원이 어느 주점에 갔다가 현재로 치면 조폭들이 드나들던 곳이란걸 뒤늦게 깨닫고는 처음 나온 작은 잔을 치우고 그릇에 독주를 담아 한번에 원샷했는데 그걸 본 주변 사람들이 어르신이라 하며 설설 기었다고. 역사적으로 술 잘 마시는 사람을 호인으로 취급되었고 특히나 북방민족 출신은 더 그랬으니...] 실제로 [[조선]]을 유람하고 간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은 술 때문에 망할 나라"라는 얘기가 많다고 한다. 이는 '[[한민족의 식사량|조선 놈들은 하도 많이 먹어]] 농사를 지어봐야 소용없다'는 얘기와 함께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조선 탐방 후기이다. 정조가 유독 병적이었다고 하기에는 조선의 술 문화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 이는 21세기 한국에서도 이어진다. 아직도 음주에 관대하고 주량을 자랑하는 문화가 기저에 깔려있다. 술 강요 문화도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편.] 하지만 이런 그도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 [[영조]] 앞에서 '''"술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술이 있는 것과 술이 없는 것은 나라에 어떠한 영향이 있겠느냐?”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술은 나라를 멸망하게 할 물품입니다.” >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지금 세상은 모두가 술을 마신다. 이것은 백성의 습속(習俗)이 나빠졌기 때문이냐, 법이 느슨해져서 그런 것이냐? 너는 마음을 속이지 말고 대답하라.”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금지하는 방도에 있어서 더러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너의 말이 옳다. 부디 성심으로 금지하라.” >하였다. >---- >《일성록》, [[1763년]](영조 39년) [[6월 29일]] 을묘 2번째 기사. 금주법까지 시행했을 정도로 술에 엄격했던 영조가 '''"성심으로 금지하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훗날의 정조를 알고 있는 후손들이 보면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대목. ||[youtube(S0MfRZbUDdo)]|| [[담배]] 예찬론자이기도 해서 담배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거나, "[[식후땡|소화에 좋고]] 추위와 더위를 쫓아낸다"고 극찬한 적이 있다. 심지어는 담배에 관한 [[시]](詩)까지 썼다.[* 반면, 그의 아들 [[순조]]는 지독한 혐연주의자였다.] 하지만 [[담배]] 역시 무조건적으로 장려한 것은 아니었다. 담배로 인해 시작된 좌의정 [[채제공]]과 유생 2명의 싸움에서, 채제공의 편을 들어준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채제공]] 문서 참고. 물론 이건 담배 이전에 유생들의 사람으로서의 됨됨이가 되먹잖았던 게 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