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정조(조선) (문단 편집) == 묘호, 시호, 휘 == * '''[[조선왕조]]''' * '''묘호:''' [[정종]](正宗) * '''시호:'''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 '''[[대한제국]]''' * '''묘호:''' 정조(正祖) * '''시호:'''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조선]]에서 올린 [[묘호]]는 '정종(正宗)'이므로 《[[정조실록]]》의 원제 역시 '정종대왕실록'이다. 비록 훗날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로 재추존되어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지만 실록명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과는 한자가 다르다. [[대한제국]]을 연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3대조인 양증조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고 __선황제(宣皇帝)__로 추존되었으며 [[존호]]가 더해져 최종적으로 '정조 선황제'가 되었다. 흔히 [[사극]]에서 [[세도정치]]기의 사람이 '정조대왕'이라고 일컫는 장면이 많은데 '정조(正祖)'라는 [[묘호]]는 [[1897년]](광무 원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격상된 후에 생긴 [[묘호]]이므로 원래대로라면 '정종대왕'이나 '정조대제'라고 해야 맞지만 2대 [[정종(조선)|정종]]과 헷갈릴 수 있어 일부러 '정조대왕'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야 할 듯. 실제로 정조는 사후 '정조대왕'이라고 불린 적이 없었다. 사후 '조선'에서는 '정종대왕'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황제]]로 추존받으며 묘호가 바뀌어 '정조 선황제'가 되었기 때문. 정조의 묘호가 조선의 '조(祖)' 남발과 도매금으로 엮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묘호가 '정조'로 바뀐 것은 대한제국 건국 당시, 고종황제의 3대조 자격으로 추숭된 것이므로 조 남발과는 관계 없는 종법상 합당한 추숭이다. 정조의 휘인 '祘'은 '셈할 산(算)'자와 같은 음으로 읽기 때문에 흔히 '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대부분의 [[백과사전]]도 '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 당대에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의 〈전운옥편(全韻玉篇)〉을 보면 발음이 '셩'(현대 한국어 '성')이라고 되어 있으며 여기에 어휘(御諱)라는 주석도 달려있다. 제목인 '규장전운' 앞에 붙은 '어정(御定)'은 [[임금]]이 정한 것이라는 의미이니 이 발음 사전은 다름아닌 당시의 군주인 정조의 명령에 의해 편찬이 시작된 것이며 정조 본인이 직접 감수까지 한 결과물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지석영]]의 《자전석요(字典釋要)》라는 한자 사전에서 이 글자의 음을 '셩'이라고 표기한 이유로 정조의 휘를 '산'이 아니라 이중모음의 단모음화를 감안하더라도 '성'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 [[옥편]]에서 저 글자를 '산'이라고 표기해 놨기 때문에 흔히 '이산'이라고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 글자를 '산'이라 읽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이 논란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나왔으니 정조 즉위 당시까지만 해도 '산'이라고 읽었으나 즉위 20년째인 [[1796년]](정조 20년)에 '산'의 발음을 '셩(성)'으로 고쳤다는 결론이 나왔다. 초기에 '祘' 이 글자를 '산'으로 발음했을 것이란 것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 《정조실록》에 있으며 이후 발음이 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내용 역시 《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76년]](정조 원년)에는 분명 '산'으로 읽고 있는데 [[1800년]](정조 24년)에는 '성'으로 읽고 있으므로 중간에 발음이 바뀌었을 것이란걸 짐작할 수 있다. [[피휘]]의 전례로 보건데 전국의 '이산'이나 '~리산' 지명을 갈아치우다 너무 많아서 결국 그냥 [[피휘|왕 이름]] 쪽의 발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1980년대까지는 정조의 이름을 '이성'으로 알았다가 '이산'으로 고쳤는데 이제 결론이 위와 같아졌다는 것. 또한 선대인 [[영조]] 대의 운서에 동자 관계인 '算'자에 '어휘(御諱)'라는 내용이 있어서 이 주장에 근거를 실어주게 되었다. 그 이유는 원래 규장전운의 해당 자리에 있던 '渻'자를 쓰던 약봉 서성(徐渻)이 자손이 매우 많아 그를 부러워하여 그의 이름과 같은 발음으로 채워 넣은 것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