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인지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는 석성현감(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을 지낸 정흥인(鄭興仁, 1363 ~ 1436). 정흥인이 내직[[별감]]에 있을 때 [[도교]]의 신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소격전에 들어가 "집안을 일으킬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얼마 뒤에 아내 진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정인지. 총명했는지 기록에 의하면 5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서책에 눈길만 스쳐도 줄줄 외울 수 있었고 1번만 보면 읽고 쓸 줄 알아 [[천재]]라는 [[소문]]이 이웃에 자자하였다고 한다. 고전을 암송하고 작문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7살에 《소학》을 깨우쳤고 13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 앞에서 강론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1411년(태종 11) 식년시 생원시에 급제했고[[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411_413374|#]] 1414년(태종 14) 식년시 문과에 응시했는데 [[일화]]를 하나 남겼다. 시험 감독관을 맡았던 [[하륜]] 등이 [[태종(조선)|태종]]에게 3개의 시험 답안을 가져와서 장원을 뽑아달라고 청했다. 감독관들의 평가는 '두 답안은 엇비슷하고 하나는 조금 처집니다'였다. 태종이 "내가 집는 것이 장원이다"라고 말한 다음 두 시권을 바치도록 하여 능숙한 솜씨로 하나를 잡으니 바로 정인지였다는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403011_001|구절]]이 있다. 그러나 [[신하]]들이 조금 처지는 하나의 답안은 미리 배제해뒀을 가능성도 있는데 정인지의 답안이 조금 더 훌륭했던 것이다.( "[[압권]]"이라는 [[단어]]의 어원 참고). 한마디로 태종은 답안지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하나 집어 장원으로 삼아버렸는데 답안지의 [[주인공]]이 바로 정인지였던 것.(태종실록, 태종 14년(1414년) 3월 11일]). 태종 본인도 [[고려]] 말기에 과거를 보아 합격한 [[경력]]이 있다. 조선 [[왕조]] 유일의 [[행정고시]] 합격 경험이 있는 [[국왕]]인 셈. 정인지는 을과 1등 1위의 장원으로 결정된 후 예빈시주부에 임명되었다. 나머지 1명으로 추정되는 [[조서강]]은 이조참판에 [[도승지]]를 지내는 등 정인지 못지 않게 [[관직]]이 높았다. 이후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거쳤는데 [[행정]] 미숙이나 일 처리를 잘못해서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했고 비상 동원 [[훈련]] 중에 [[술]]을 먹는 짓 등 부적절한 행동으로 [[탄핵]]된 경력도 있다. 정인지가 투옥되거나 벌을 받는 기록을 보면 그 원인은 주로 도장을 잘못 찍거나 의례에 필요한 의장을 빼먹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병조좌랑 때는 의장을 빼먹은 죄로 [[태형]] 40대까지 맞은 기록도 보인다. 이런 것을 보면 똑똑하면서도 [[덜렁이|덜렁대는 인물]]이었던 듯. 하지만 세종이 즉위할 즈음 관직 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는데 [[상왕]]으로 있던 태종도 세종에게 '''"크게 쓸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 후 예조판서,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등의 여러 요직을 거치며 [[천문]], [[역법]] 사업에 뛰어들어 세종 시대 [[과학]] 발전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천문과 [[산술]]에 뛰어난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세종은 정인지를 두고 "간의, 규표, [[경복궁 흠경각|흠경각]], 보루각 등의 제작에 있어 다른 신하들은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나 정인지만이 이를 함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정인지를 앞에 두고 [[원나라]] 대의 산학서(지금의 [[수학]]책)인 <산학계몽(算學啓夢)>을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을 정인지에게 직접 물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 “上, 學 <啓蒙算>, 副提學鄭麟趾入侍待問, 上曰: “算數在人主無所用, 然此亦聖人所制, 予欲知之.(상, 학<계몽산>, 부제학정인지입시특문, 상왈: 산수재인주무소용 열차역성인소제 예욕지지)” > - 세종실록 12년(1430년) 10월 23일 > > 해석하면,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鄭麟趾)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 또한 역대 역법의 같고 다른 점과 [[천체]]의 움직임 같은 천문 현상들의 관계를 종합하여 <[[칠정산]]> 내편을 편찬하기도 했는데 워낙 셈이 정밀해서 아무리 노련한 일관도 정인지의 [[계산]]을 따라잡을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혼천의]](천체 관측 기구)와 [[앙부일구]](해시계) 등의 기기를 [[정초]]와 함께 설계하였고 이 설계를 바탕으로 [[이천(조선)|이천]]이 최종 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인지는 삼남 지방의 모든 [[토지]]를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한 어마어마한 일을 실행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기존의 조세법인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막기 위한 새로운 [[공법]]을 위해서였다. 정인지는 공법 논의를 부활시킨 [[관료]]로서 이미 세종이 과거 시험(중시)에서 공법에 관한 문제를 내었을 때 이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 의견을 피력하여 세종과 그 뜻을 함께 한 인물이었다. 이로서 정인지는 공법 시행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고 삼남 지방에 대한 공법의 시범 실시를 위해 해당 지역의 토지 등급을 모두 정하는 막중한 일을 수행한 것이다. 결국 공법 시행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기존의 답험손실법보다 훨씬 더 예측 가능하고 효율적인 [[조세]] 징수 체계를 갖출 수 있었고 [[백성]]들의 실질적인 세부담 역시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더욱 자세한 내용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0080500001&code=960100|기사]]를 참조.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자치통감]]> 훈의의 편찬이나 [[김종서(조선)|김종서]] 등과 함께 <[[고려사]]> 등의 편찬을 맡기도 했다. 김종서가 [[계유정난]]으로 [[역신]]으로 전락했으므로 현재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모두 편찬 주관자 명의가 정인지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훈민정음>의 공식 설명서인 해례본의 서문을 쓰고 해례본 편찬과 <[[용비어천가]]> 제작에 적극 참여한 사람도 바로 정인지다. <훈민정음>의 광범위한 보급은 물론이고 창제 원리에 대한 서술을 담은 해례본의 서문을 정인지에게 손수 맡겼다는 사실은 세종이 정인지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은 생전에 정인지를 깊이 신뢰해 그에게 자신의 실록인 <세종실록> 편찬을 직접 수행하도록 하였다. 자신의 실록을 맡겼다는 것은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를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글날]]이 [[10월 9일]]이 된 것은 정인지 때문이다. 바로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이 [[음력]] 9월 상순(음력 9월 10일)에 쓰였기 때문. 이를 [[태양력|양력]]으로 바꾸면 10월 9일이 된다. 이를 기념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제정하였다. 아래는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 "정통 11년(1446년) 9월 상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신 정인지는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씀."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은 내용 측면에서 심오한 [[철학]]이 깃들여 있고 형식 측면에서 빼어난 비유와 함께 쉽고 정갈한 문장으로 쓰여져 있어 명문으로 손꼽힌다. 예를 들어, > (세상에) 천지 자연의 (이치에 맞는) 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이치에 맞는) 글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중략) … > 그러나 세계는 기후와 토질이 (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말소리의 기운도 또한 (이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 (중략) … > (그런데) 대개 중국 이외의 나라 말은 그 말소리는 있으나, 그 글자는 없다. > 중국의 글자를 빌어서, 그리하여 그 사용을 같이하고 있으니, > 이는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과 같이 서로 어긋나는 일이매 > 어찌 능히 통달해서 막힘이 없을 수 있겠는가? > 요컨대 (글자란) 모두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 따라서 정해질 것이지, > 그것을 강요하여 같이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중 일부 세종 시대의 과학뿐 아니라 역사학 및 [[문화]] 발전 전반에 막대한 공헌을 한 인물(본격 [[문과]], [[이과]] 파괴자). 또한 정인지 본인도 세종을 칭송하는 등 군신 간의 관계는 좋았다. 세종이 살아 있을 때 [[글자]] 그대로 [[소울메이트]]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침 [[임금]]과 신하라는 위치를 떼고 보면 세종보다 겨우 1살이 더 많은 [[친구]]나 다름없는 연령대라 세종 대의 내로라하는 [[인재]]들 중에서 가장 [[마음]]이 잘 맞았을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