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인승 (문단 편집) === 초년기 === 정인승은 1897년 5월 19일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정상조(鄭相朝)이며, 모친은 송성녀(宋姓女)이다. 부친은 유학자로, 평소에 아들에게 일제에 빌붙어 살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정인승은 훗날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선친께서는 서울에 갔다 오시면 여러 가지 책을 사다 주시며 공부 잘해야 된다고 타이르셨다. 그러나 선친께서는 공부를 하되 나라가 이 모양이 된 마당에 돈 주고 사는 벼슬을 하려거나 출세를 하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특히 일본이라면 질색을 하신 까닭에 '아무리 왜놈 세상이 되었다지만 그 밑에서 벼슬할 생각은 말라.'고 준엄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 ><국어 운동 50년> 또한 그는 가족이 일본에게 직접적인 해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동네에서 가장 크던 우리 집은 일본군에게 징발당하여 병참소로 사용되었다. 우리 집을 근거로 주변에서 의병 토벌 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밤이면 이들이 잡아온 의병들을 고문하느라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동네 앞산 소나무에 사람을 달아 놓고는 총살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중략)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마을에 머물면서 갖은 나쁜 짓을 하고 있던 중 하루는 나의 형 인영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다친 적도 있었다. >---- ><국어 운동 50년> 정인승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일제에게 반감을 품으면서도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에 전념했다. 그는 향리에서 한학자 한응수에게 한문을 익혔으며, 이후 전북 진안군에 위치한 용담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연정학원과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를 거쳐 내자동에 있는 종교예배당 영어 강습소에서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신학문에 접하기 이전의 한학 공부도 거의 모두가 언해로 된 책을 통해 혼자서 공부했다. 이 언해본을 통해 사서삼경의 질서를 모두 익혔으니 한글과의 인연은 이때부터였다고나 할까. 또한 그 때에 할머니께서 병환으로 누워계셨는데, 심심하시니까 나를 불러 국문 소설 책을 읽게 하셨다. (중략) 국문을 연구해야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국어와의 인연을 맺게 된 자연적인 계기가 이 때가 아니었던가 한다. >---- ><국어 운동 50년> 이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그는 영어를 주로 공부했는데, 우리 말과 한글에 관련해서는 수사학 담당 교수이던 [[정인보]]와 같은 학부 3년 선배이던 [[김윤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특히 김은경으로부터 [[주시경]]의 국문본 학설을 얻어들으면서 한글에 대해 많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김윤경은 그의 옛스승 주시경 선생의 창의적인 국어문법 학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하여 나에게 우리말을 연구하게 영향울 준 바가 적지 않아 영문법 교수인 백남식 선생의 <영어 구문론 해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한 것과 함께 나름대로의 국어문법에 대한 이치를 전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 ><내 나이 여든 일곱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