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의 (문단 편집) === 대중문화에서의 정의 === 거의 모든 [[예술]] 작품에서 [[주인공]]을 정의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장치를 사용하는데, 이는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장치일 뿐 실제로는 주인공의 행동이 공공선을 실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령 [[아르센 뤼팽]], [[임꺽정]], [[배트맨]] 등이 정의롭게 그려지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에는 [[사적제재]]를 일삼는 범죄자로 볼 수 있다. [[혼돈 선]]에 속하는 예시다. 대중문화에서는 [[원피스(만화)|원피스]]를 예로 들 수 있다. [[주인공]] 집단인 [[밀짚모자 해적단]]을 예시로 들자면 해적들의 특징인 [[약탈]]이나 민간인 습격도 안하고 심지어 작은 마을부터 거대한 국가까지 동료나 친구와 관련된 문제라면 어떤 위기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와주는 등. 다른 해적단에 비해 천사나 영웅처럼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을 기준으로 보면 여타의 해적들처럼 [[해군]]들을 조지고 다니는 [[악당]]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작품이 진행되면서 주인공 측이 절대선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소년만화]]치고는 독특한 경우가 되었다. 특히 [[임펠다운]]에서 의형제를 구하려다가 흉악 범죄자들이 줄줄이 탈옥하게 된 것은 큰 병크다. 그 밖에도 [[주인공]]이 [[살인]]이나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지만 선하게 그려지는 모든 작품들도 이에 해당된다. 때문에 창작물에서의 정의는 실제보다 더욱 상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에는 대놓고 정의가 아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두어 부조리극의 느낌을 내는 경우도 많고, [[피카레스크]]라는 장르도 생겼다. [[브레이킹 배드]]와 [[데스 노트]]가 대표적. [[피카레스크]]물이 아닐 경우, 주인공 이외에 자신을 정의라 칭하는 자는 대체로 독선, [[민폐|민폐쟁이]], [[위선자]]라는 [[클리셰]]가 있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가지는 [[신념]]의 기반. 신념이라고 해서 거창한 거 같지만 [[서브컬처]]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사회제도나 분배 같은 것들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라 약자를 폭력으로 유린하지 말아라,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는 데서 그친다. 사실 정의로운 [[주인공]]이라고 해서 [[정의의 편]]으로 나와서 [[악당]]을 물리치며 '정의가 승리한다'라고 외치는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우나, 대부분의 주인공은 자신을 정의라고 칭하지 않는다. 이는 그러한 행동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금칠하는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선한 인물이 선행을 하면서 '나야말로 천사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선한 거 같다.'라고 자화자찬하는 경우가 없는 것처럼 생각 있는 창작자라면 정의로운 일을 해도 자기가 정의라고 자화자찬하는 주인공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정의라고 주장하는 대신에 주인공은 작중에서 더 간결하며 실천적인 행동을 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는 행동이 대표적이다. 사실 열혈형 주인공 중 상당수도 정의의 편에 해당하는 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요즘은 이에 반해 [[다크 히어로]] 같은 소시민형 주인공이 많이 나오는 추센데 이는 히어로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정의의 편인 주인공이 범람하면서 그러한 유형의 스토리가 식상해지면서 주인공의 유형이 다양화된 것이 이유일 것이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정의의 편인 주인공 역시 큰 인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히어로 개인의 법 정신 때문에 악역에게 직접 심판을 가하지 않고 법에 의한 심판에 의존하는 것에 답답함에 직접 악당에게 폭력으로 응징하는 [[다크 히어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정의란 이름으로 비열하거나 잔혹한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최종적인 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원피스(만화)|원피스]]의 [[해군본부(원피스)|해군본부]], [[CP9]] 등) 또는 그들에게 대립하여 '이긴 자가 정의다. 정의를 주장하는 건 멍청하다' 라는 주장을 하는 인물들도 나오는데 이를 기존의 서브컬처에서 말하는 정의를 비판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존의 주인공들이 말하는 정의, 약자의 보호는 개인의 기본권 보호에 가깝다. 이는 사회계약과 관련된 부분이기에 이를 비판하려면 사회를 부정하고, 사회란 순수하게 약육강식을 추구하는 곳이라고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만도 아니다. 또한 이긴 자가 정의가 된다는 주장의 경우, 세상이 승자와 패자만으로 양분되는 것도 아니므로 현실과도 어긋난다. '성공하면 쿠데타, 실패하면 반란'이라지만 쿠데타로 권력자가 되어도 타국의 눈엔 그냥 [[군벌]]이거나 [[독재자]]일 뿐이다. '''[[인도인]] [[벵골 대기근|700만 아사]]를 일으킨 [[윈스턴 처칠]]은 왜 아직도 [[영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가? [[아돌프 히틀러]]가 패배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범죄자로 낙인이 찍혔을까?'' 물론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정말로 세계를 정복했다면]] 한동안은 이북의 독재자처럼 영웅시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정권이 과연 얼마나 유지될까?'''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승자가 정의다 대게 역사를 깊이파지않는 경우 대게 사람들은 히틀러의 유대인학살을 배우지 처칠의 뱅골 대기근과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학살도 깊이 알지않는 이상 알기쉽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어릴때 why역사책에서 나치는 악 미국은 선인 뉘앙스로 나온다. 물론 어디까지나 표면상으로만. 실상 일부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미국이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안다. 이기는 게 정의라는 말은 표면상에서나 성립되는 셈이다. 다만 이와 비슷하게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학살은 여지껏 사람들의 인식 속 멀리 벗어나 있던 주제였고, 2010년에 들어서야 [[미국 정부]]의 사과와 잘못을 인정받았다. 한때는 [[할리우드]] 같은 대형 미디어들도 역사적 왜곡에 동참하였다.[* 인도 대기근의 아사자의 경우 [[윈스턴 처칠]]의 책임도 분명하나, 이는 자연재해 및 전쟁 중에 일어난 참사란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니깐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의 학살과 비교 불가란 것이다.] 사실 미국이 지금 패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눈에 안 띄는 거지 [[민주주의/밈|미국도 더러운 일 엄청나게 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암살 시도만 수 백 번이었고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마음에 안 든다고 쿠데타를 지원하고 [[피노체트]]가 사람들을 학살하는 걸 방조한다든지 아이티의 대통령이 반미 노선이라고 경쟁자에게 대선 자금을 미국 대선 자금을 한참 뛰어넘는 양으로 퍼주고 그래도 선거에서 지자 그냥 쿠데타를 일으켜서 쫓아냈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미국이 패권을 잡고 있어서 보도도 안 되고 사람들이 알고 있지도 않다. 시대가 지나면 진실이 밝혀진다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괜히 촘스키가 미국 대통령들이 재판 받으면 사형 안 받을 사람 없다고 까는 게 아니다. 정의는 주로 [[배틀물]]이나 슈퍼히어로 코믹스[* 간단히 [[히어로]]와 [[다크 히어로]]의 관점]에서 시각과 실천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대표적으로 [[슈퍼맨]]에겐 정의는 헌신과 '''어둠 속을 비춰주는 등불'''이며, [[배트맨]]에겐 정의는 폭력이며 '''죄의 대가를 공정히 판단하는 천칭'''이다. 이러한 대립은 [[장갑악귀 무라마사]]에서도 주요 테마로 등장한다. [[미나토 카게아키]]와 [[아야네 이치죠우]]는 정의에 대한 관점 때문에 대립하게 된다. 전자에게 정의는 분쟁의 근원이며, 오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쌍쇄로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하는데 집착하는데 비해 후자에게 정의는 사악을 끊는 것,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에게 응징을 가하는 것이다. 또한 정의가 독선이라는 관점은 [[다나카 요시키]]의 작품인 [[아르슬란 전기]]에서 잘 드러난다. 이상가라 할 수 있는 나르사스는 정의는 유일하지 않고, 하늘의 별 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말하며, 음모가인 자하크의 추종자의 스승은 '''정의는 자신 이외의 존재를 [[악]]으로 정할 때 성립된다'''고 말한다. 정의가 독선이라는 관점은 [[미즈카미 사토시]]의 작품인 [[플래닛 위드]]에서도 주요 테마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정의구현]]을 명목으로 하여 자신이 [[악]]으로 규정한 세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하게 섬멸하면서 악에 대한 징벌이라는 미명 아래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는 [[악역]]을 묘사하면서, 정의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작품에서 정의는 작품 내에서 벌어지는 여러 [[비극]]의 씨앗으로서 그려진다. 또한 이렇게 정의가 독선이며 비극의 씨앗이라는 관점 이외에도, 이 작품에서는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정의관을 통해 정의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이 나타난다. [[김성한]]의 단편소설 <바비도>에서 '정의는 [[권력]]의 [[버섯]]이다' 라는 말이 잠깐 언급된다.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정의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하는 것이라 한다.[* 예시 : 내 목숨은 소중해. 따라서 네 목숨도 소중해.] [[슈타인즈 게이트]]의 후속작 첫 에피소드인 '주지선상의 지킬'에서는 오카베 린타로가 '정의의 편' 알카파맨(...)이라는 괴악한 히어로 복장을 하고 정의의 편인 척 한다. 능력 따위는 없지만 타임리프를 써서 결과를 바꾸면서 '정의의 집행자'를 연기하는데, 여기서 징벌적인 정의의 모순점들이 드러난다. 순서를 보자면... '텐노지 나에'가 원하는 게임 소프트를 아침 일찍 판매하는데, 어떤 [[중2병]] 환자들이 새치기하고 다 털어간다. 타임리프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 뒤 그들을 쫒아내는데, 쫓아내고 보니 그들은 일일알바로 사재기 알바에 가담했던 것. 알파카맨 덕분에 그들은 돈이 없고, 그래서 그들은 무전취식을 해야만 했다. 무전취식하면서 스턴건으로 오카베 린타로의 지인을 피해 입혔는데, 그것을 용납 못하고 또 타임리프해서 그들을 막았다. 막은 뒤에 그들 역시 불쌍한 입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재기 그 자체를 엿먹이면서 그 [[중2병]] 환자들의 알바비는 얻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사재기 한 사람들 역시 '라운더'라는 어두운 조직의 상납금을 바쳐야하고, 안 그러면 목숨이 위험했던 것. 덕분에 오카베 린타로의 지인이 사재기의 원흉이어서 오카베 린타로는 자신의 지인의 자살을 알게 된다. 누군가를 벌하면서 그 누군가 역시 피해자가 되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정의'의 또 다른 반대편이 '악'이 아닌 '정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정의에 대한 관점은 아무래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고, 이러한 정의관의 차이는 역시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 선악관과도 연계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정서적으로 [[권선징악]]이 그다지 중시되지 않아서(때로는 [[권악징선]]이 보다 부각되기도 한다) 선과 악도 그저 시각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통용되고 있고 정의에 대해서도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불의나 악이 아닌 또 다른 정의라는 인식이 있지만, 반면 [[한국]]에서는 권선징악을 중시하는 정서가 있으며 정의에 대해서도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또 다른 정의가 아닌 그저 불의 내지는 악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당연히 이러한 나라마다의 시각차는 예술 작품에도 반영되는데, 예를 들어 [[악역]]이 [[미화]]되는 것에 대한 한일 양국 간의 시각차도 상당 부분이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선악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그 영향으로 정의에 대한 관점도 다르기 때문. 이러한 정의관의 차이는 [[도덕]]적인 [[논쟁]]에 관련한 나라 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성리학]]의 [[https://news.joins.com/article/23270178|영향]]으로 인해서 오직 하나의 완전무결한 절대선만이 대접받는 [[흑백논리|극단적인 선악 이분법]]에 근거하여 사회가 형성되어 있기에 각각의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인지를 끊임없이 강조하여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경쟁]]상대의 도덕적 결함을 들춰내어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기에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체념하지 않고 극복해낼 수 있지만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다를 바 없는 양상을 보이는 끝없는 투쟁 속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던져 넣는 사회가 되고 있기도 한 [[한국/사회|한국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단지 체념하고 넘어가려 하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12251589096891|경향이 짙어]] [[부정부패]]나 각종 사회적 병폐에 대해서도 눈감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일본/사회|일본 사회]] 사이에는 자연히 정의관이 서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기질을 대조하면서 일본인들은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자신에게만 몰입하는 '[[오타쿠]]'가 되기 쉬운 기질이 있어 사회 상층부의 부도덕성에 대해서도 [[비판]]을 별로 하지 않지만 한국인들은 거침없이 사회 상층부의 부도덕성을 비판한다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908051803425|분석이 나오기도 했는데]], 한일 양국 간의 정의관의 차이는 이러한 양국의 사회적 차이에서 어느 정도 기원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초인 고교생들은 이세계에서도 여유롭게 살아가나 봅니다!]]와 같이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또 다른 정의가 아닌 악일 뿐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작품도 있긴 하지만, 해당 작품의 경우에는 '[[교조주의|왜냐면 우리가 정의고 너희가 악이기 때문이다]]'라는 [[내로남불]]스러운 논지로 그런 주장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 논지가 지나치게 독선적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의 극단적인 정의관과 선악관은 [[권선징악]]을 중요시하는 [[한국]]에서조차도 강한 비판을 받았다. * 관련 문서 - [[정의의 편]], [[신세계의 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