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윤희 (문단 편집) === 연예계 활동 === [[파일:정윤희2.jpg]]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원래는 1974년에 [[바보들의 행진]]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데뷔할 예정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영화 출연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데뷔작인 욕망은 데뷔작이라고는 하지만 영화 크레딧에 정윤희의 이름도 빠져있고 흥행조차 실패하며 또 하나의 무명 여배우로 남나 싶었으나... 정윤희는 2번째로 영화 출연 기회를 맞이한다. [[김지미]], [[윤정희(1944)|윤정희]]가 거쳐 간 [[청춘극장(1975)|청춘극장]]의 주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원래 신인 여배우 강경희가 맡기로 한 자리였으나 강경희가 [[박동명 사건]][* 여러 여배우가 연루된 스캔들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 촉망받던 신인으로 거론되던 양정화의 경우는 이미지 타격이 심각해서 은퇴할 수 밖에 없었다.]에 연루되어 그 자리에 정윤희가 대신 들어간 것이었다. 비록 청춘극장은 거하게 실패해 버렸지만, 이전의 유명 여배우였던 김지미, 윤정희가 맡았던 배역을 맡았다는 점으로 인해 그녀의 지명도 상승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제과]]의 전속모델이었던 [[양정화(배우)|양정화]]도 박동명 사건에 휘말리며 계약이 파기당했는데 정윤희가 이 해태제과의 모델 자리를 차지하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youtube(s-7LnO7p1_M)] 예시 광고([[바밤바]]). 박동명 사건으로 인해 얻은 반사혜택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청춘극장으로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당시 거대 방송사였던 [[동양방송]]과 전속 계약을 맺어 활약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정윤희는 동양방송의 인기프로그램인 [[쇼쇼쇼]]의 2대 MC를 맡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대 MC는 --[[개그린버스]] 드립으로 유명한-- 코미디언 [[곽규석]]이었고, 뒤를 이은 MC는 [[허참]], [[정소녀]]였다.] 이때 당시 더블 MC였는데, 정윤희의 파트너는 동양방송 전속가수였던 [[위키리]](본명 이한필)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드라마 ‘[[청실홍실(드라마)|청실홍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정윤희는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실홍실에서 정윤희는 부잣집 여대생역을 맡아서 여주인공 장미희와 삼각관계를 이루는데 드라마에 나온 정윤희의 세련된 외모가 주목받으면서 그 해에 가장 예쁜 연예인으로 선정되었다. [[파일:1471507637441.jpg]] [[동양방송|TBC]] 드라마 '청실홍실' (1977) 한편, 영화에서는 [[얄개 시리즈]]에서 나두수의 누나인 나두주 역으로 출연하며 우스꽝스런 이미지를 소화한다. 나두수가 나두주의 얼굴에 낙서한 장면이 유명하다.[* [[조흔파]] 원작에 [[이승현(1961)|이승현]]([[임권택]]의 [[울지 않으리]]에 나온 그 사람)주연의 영화. 정윤희는 여기서 여교사인 나두주 역으로 출연해서 백승도([[하길종]]의 동생,하명중이 배역을 맡았다)랑 결혼하는 엔딩을 맞는다.] [[1978년]]에는 당시 붐을 이루던 호스티스 소재 영화인 [[나는 77번 아가씨]]의 주연을 맡아 --정윤희의 벗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남자들의 기대감 속에-- 흥행 성공을 이끌어냈고, 이때부터 여배우 트로이카의 1인으로 영화계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가수로 데뷔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까지만 해도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까이기도 종종 까였으며, 그 때문에 ‘말뚝’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정윤희는 연기력으로 주목받던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1979]]년에는 [[유지인]]과 더불어 영화 실적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녀는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의 사냥꾼]], [[사랑이 깊어질 때]], [[가을비 우산속에]], [[우요일]],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출연했고 이 중에서 사랑이 깊어질 때랑 우요일을 제외하고 무려 1년 만에 4편의 영화를 성공시키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기록은 지금도 보기가 힘들다. 한편, 같은 해인 1979년에 '[[야 곰례야]]' 등 동양방송 드라마들의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정윤희는 순박한 시골 처녀역을 소화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MBC]]로도 출연 범위를 넓히며 드라마에서도 계속 활동을 하는 한편 노출 빈도가 있는 호스티스 소재 영화들부터 ‘사랑하는 사람아’ 같은 멜로물을 오가며 계속 해서 인기 스타로 군림했다. 특히, [[1981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하며 동양방송을 이은 [[KBS]]에서 MBC로 정윤희가 드라마 출연 범위를 넓힌 일은, 그때까지 공고히 유지되고 있던 방송사 전속 탤런트 제도가 붕괴되는 시초가 되었다.[* 최초는 아니었다. 이전에도 [[김자옥]]이 KBS와 MBC를 넘나들며 활동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1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영화에 가득 표현해 내는 한편 여우주연상까지 타내며 연기력 면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토속적인 주제를 다룬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또 다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파일:external/kwave.koreaportal.com/028b6d5855c90f12c8e05e0a91b288ce_OUJeLeZnrY3I5NilNkpxTEG2c.jpg]] 레전드가 된 영화 속 한 장면[*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의 한 장면이다. 얼굴이 까맣게 나왔는데, 화장을 안해서 그렇다.] [[파일:정윤희 물망초.jpg]] [[1982년]]에 성공한 [[영화]]로는 [[여자의 함정]]이 있다. [[애마부인]] 다음으로 흥행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연속극]]에서는 코믹연속극 세자매의 막내딸로 출연하여 정동환과 호흡을 맞추었다. 연속극 고백에서는 기존의 연약한 여성상이 아닌 강한 여성상을 보여줬다. 드라마에선 발랄한 젊은 여성 역을 맡은 일이 많았으며 CF쪽의 이미지도 이런 드라마쪽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편 정석적인 최루성 멜로물의 여주인공 역도 자주 맡았다. 한데 영화 쪽에선 남자들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역할이라 해야할지, 미모 자체가 죄가 되어 주변 남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이 되어 휘둘리며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역을 맡은 일이 많다. 70년대 후반부터는 당시 영화계 분위기가 노출 장면이 빠지지 않던 분위기여서 출연한 영화에서 노출 장면을 보인 일도 자주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