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욱 (문단 편집) === [[관도대전]] === 관도 대전 발발 당시 견성을 도맡아 지키고 있었는데 이 당시 정욱의 군사가 많지 않았다. 원소가 10만 대군을 데리고 남하할 경우 견성은 제일 처음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조조는 이에 2천명의 군사를 더 보내고자 했으나 정욱은 '여기서 병력이 증원되어 봤자 제대로 못막고 뜷리는건 똑같다. 하지만 원소의 오만함은 잡졸이면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 둘것이나 여기에 2천이나마 추가되면 위협을 억누르는 의미에서라도 오히려 견성을 노리려 들 것이다. 그러니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선 지원을 안보냄이 옳다.'라고 거절하고 실제로 원소는 견성의 병력이 1천도 안 되는 걸 알고 자신들에게 큰 영향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겨 무시하고 지나친다. 조조는 가후에게 편지를 보내 정욱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춘추시대 때 이름난 장사들. 이 둘을 합칭해 '분육(賁育)이'라 해서 힘세고 용감한 장사에 대한 일종의 대명사처럼 쓰였다.]보다 뛰어나다며 담력을 칭찬했다. 관도대전 동안은 상술한 대로 견성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원소 생전엔 견성을 무사히 지켜낸 것 외엔 별 활약이 없었으나 대전발발 이후 ~ 원소의 병사 때까지 견성 주변 여러 장소에 숨어있던 유민들을 거두며 수천의 정병을 훈련시켰고[* 상식적으로 그 유민 모두가 군인이 되려는 적령기 남성일 리가 없으니 실제로는 적령기 남성만해도 수천에 그 외 인원까지 포함하면 수만일 가능성이 높다. 즉 수천의 군사에 수만이나 되는 백성을 얻은 셈이다.] 원가 내부에서 후계자 다툼으로 갈등이 빚어질 때 이 병사들을 이끌고 조조와 합류, 여양에서 원담과 원상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분무장군의 지위를 얻으며 동시에 안국정후로 봉해져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