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안국 (문단 편집) === 파편적인 기록들 === 946년 [[백두산]]이 폭발했다. 압록강은 백두산의 화산쇄설류가 그대로 뒤덮이는 범위 안에 있었으므로 엄청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70년에 [[열만화]](烈萬華)가 [[북송]] [[송태조|태조]]에게 사신을 보냈다. 976년에 [[오현명]](烏玄明)[* 936년 [[후당]]에 사신으로 갔었던 [[오제현]](烏齊顯)의 혈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원흥(대흥)으로 정했다. 오현명이 열만화와 성씨가 다르기 때문에 [[정변#s-1|정변]]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뒤따르지만, 열만화의 성씨가 오씨, 즉 오열만화이므로 정상적 계승이라는 이설도 있다. 그러나 이는 가능성이 떨어지는 게 열주도(列周道)라는 다른 열씨 인물의 존재가 확인되며 발해의 49족중에 열(列=烈)씨가 기록되어 있었고 발해 당대의 귀족사회에서도 이미 2~3자 성명이 정착해 있었다. 또 다른 추정으로는 아래의 오현명의 국서에서 할아버지라 지칭한 인물이 열만화가 맞다면 열만화에게 남계 자손이 아예 없었거나 아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어 외손자에게 지도자 자리를 물려준 것일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열만화는 오현명의 외할아버지가 되므로 아래의 할아버지라는 지칭에도 별 문제가 없어진다. 979년 [[발해유민]]이 또 고려로 투항했다. 수만 명이 내투해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발해의 왕자인 [[대광현]]이 유민 수만 호와 같이 망명해온 이후로 최대규모의 유입이었다. 981년 오현명이 북송([[태종(송)|송태종]])에 사신을 보내 요를 협공하여 반씩 가지는 것을 제안했다. >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아룁니다. (중략) 신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유민]]으로서 (중략) 근년에 거란이 강포한 힘만 믿고 우리 영토를 침략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으나, 저희 할아버지께서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이에 따르면 열만화는 그의 할아버지격이 될 수 있다. 물론 오씨가 열씨에게서 왕좌를 찬탈한 것이 맞다면 그냥 단순히 오현명의 할아버지 또한 열만화의 저항운동에 참여했던 것을 지칭한 것일 수도 있다.] 백성들과 함께 난을 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힘을 길러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__또 부여부가 근래에 거란에서 등을 돌려 우리 나라에 귀순하였으니,__ 재앙이 장차 이르게 되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천자]]의 [[천조|조정]]으로부터 비밀 계획을 듣고, 정예의 군사를 거느려 거란 토벌을 돕고자 합니다. 기필코 원수를 갚고 싶으니, 감히 명령을 거역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오현명은 진실로 간절히 원하며 삼가 고개를 숙입니다. >---- >원흥 6년(981년) 10월 ?일,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성스러운 [[황제]] 앞에 표문을 올림. 하지만 북송은 [[서하]]를 견제하는 데 정신이 없었으며 요에는 오히려 밀리는 형세였다. 983년 ~ 984년에 결국 요가 정안국을 털어갔다.[* 상술했듯이 정안국의 국력도 굉장히 약했다.] 고려가 정안국을 도왔다는 기록은 없는데 고구려의 계승국을 자처한 고려이긴 하지만 명분과 동포애보다는 냉철한 이해 관계가 앞선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후계인 발해의 후신 정안국은 잠재적으로 고려랑 맞서 고구려의 정통성을 다툴 소지가 있었을테고[* 물론 이건 정안국 입장에서도 국력에서 훨씬 열세인데다 아쉬운 입장이었으니 고려에게 그런 주장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는 소국인 정안국을 돕고자 패권국인 요나라를 주적으로 돌리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고려는 2대 혜종부터 4대 광종까지 호족세력간의 치열한 내분이 있다가 겨우 정리하고 행정체계를 정비한 수준에 그쳐 있어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는 지도 의문이다. 당시 요나라가 현재 의주 지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내원성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못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국경지역에 성을 짓는 건 도발행위 그 이상으로 치부됐다 왜냐하면 국경지역에 언제나 침공 가능한 규모의 군사들을 주둔시킬수 있다는 메세지를 간접적으로 보내는 것이기 때문 실제로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도 요동정벌을 위해 계속해서 압록강과 인근 지역에 성을 계속 짓고 보수를 진행했고 명나라 또한 이 문제에 관해 조선에 신경질을 낼 정도로 민감한 문제이기도 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거란에 탈탈 털리면서 정변까지 일어났다. 고려는 정안국의 일을 들어 [[흥료국]]에도 역시 지원군을 보내질 않았다.[* 다만 흥료국 때는 어수선한 만주의 정세를 틈타자는 참지정사(參知政事) 곽원(郭元)의 강력한 주청에 따른 출병이 있긴 했으나 실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