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수장학회 (문단 편집) === 설립 배경 === 1958년 [[부산일보]] 산하에 부일장학회가 설립되고 몇년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부정부패의 척결을 내걸고 주요 기업가 15명을 구속하고 "부정축재처리법"을 제정하여 부정으로 축재한 기업가 27명에게 거액의 벌금을 부과하였는데 여기에 구속된 사람 중 한 사람이 김지태였다. 1962년 어느 날 [[3.1 운동]] 유공자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가 26만환을 박정희에게 전달하면서 장학회를 운영해 달라 부탁했다. 1962년 5월, 혁명[* 당시 정변 주도 세력은 [[5.16 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치켜세웠다.] 1주기를 맞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16 군사정변|5.16]]을 계기로 나타난 국가재건과 인간개조의 혁명정신이 세대를 이어가며 청소년들 사이에서 전해흐르게 하는 장학사업을 범국민적이며 거족적으로 추진하는 중심기구[* 출처[[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20711002091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2-07-11&officeId=00020&pageNo=4&printNo=12514&publishType=00010|#]]]를 만들어 유능한 인재들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5.16장학회'를 설치했다. 이때 두 달 정도 구금생활을 하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문화방송|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쓴 며칠 뒤 공소취하로 풀려났고, 이후 '''5.16 장학회'''로 바뀌었다. 박정희 스스로가 기부금을 내자 수많은 공무원 공직자들이 동참했고, 하와이를 위시하여 국내외에서 기부금이 몰려들었다. [[이병철]]과 [[박흥식]] 등 기업인들도 기부금을 냈다. 김지태는 전처와 이혼(?)하고 재혼하였는데, 새 부인에게 7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밀수하여 선물했고, 이에 화가 난 전처의 처남이 부정축재로 고발을 했다고 한다. 1962년 5월 24일 검찰은 그에게 7년을 구형했고, 이에 겁을 먹은 김지태는 그가 소유한 땅 10만평을 국방부에 기증했다. 하지만 오씨 성을 가진 담당검사는 돈과 처벌을 맞바꿀 수 없다며 그의 석방을 거절했다. 그러자 김지태는 이 땅을 ‘5.16장학회’에 다시 기부했다. 2중 헌납을 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 10만평을 국방부로 넘겨주었다. 설립자인 김지태가 재산해외도피 혐의 등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두 달 정도 구금생활을 하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쓴 며칠 뒤 공소취하로 풀려났고, [[부산MBC]]+서울MBC+부산일보+일부의 토지들을 모태로 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장학재단’을 만들고 여기에 [[박정희]]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서 자금을 눈덩이처럼 불렸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김지태가 내놓은 장학재단 자금이 100%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김지태가 내놓은 MBC 및 부산일보 지분은 15%에 불과하고 85%가 새로 불어난 기부금이 차지한다. 이후 [[10.26 사건]] 후 [[언론통폐합]]에 의해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지분 70%를 국가에 넘기고 1982년에 명칭이 '''정수장학회'''로 바뀌었다. 박정희의 '정', 육영수의 '수'에서 따온 이름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 생가 인근에도 '정수초등학교'란 초등학교가 있는데, 위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같은 유래의 이름이다. 단, 해당 학교는 구미시 공립 초등학교로, 정수장학회와는 무관하다.] 현재 [[문화방송]]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사실 이는 미디어법 위반 사항이다. 원래는 한 언론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 다른 언론사의 주식을 취득하는 데에 있어서 지분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부산일보만 정성껏 운영하고, 문화방송 쪽에는 아예 일절 간섭하지 않고 있다. 그덕에 방통위에서도 굳이--[[박근혜|그분]]과 엮여있으니-- 건들지 않고 있다.] 김지태의 유족들은 박정희가 5.16 이후 거사자금으로 500만환을 김지태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재산을 빼앗은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지태는 1976년 '나의 이력서'라는 자서전을 냈는데, 여기엔 박정희와 휘하들이 거사자금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없다. 진실화해위와 국정원의 과거사위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하여간 김지태는 총 5,456만 3,000환의 환수금을 내야 했다. 1962년 3월 김지태를 부정축재처리법 위반혐의 등으로 입건했다. 그의 부인은 외환관리법 위반혐의과 밀수 등으로 구속되어 부부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동년 5월 군 검찰이 김지태에게 징역 7년을 구형하자, 그는 부산일보 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언론 3사의 재산 환원을 결심했다. 언론 3사를 정부에 헌납한 후 그는 바로 석방됐다. 그가 헌납한 기본 재산을 토대로 하여 5.16 장학회가 1962년 7월 14일에 발족하였다. 이 헌납이 정수장학회=장물 이란 논리의 근거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법원에서 ‘완전한 강탈’은 아니라고 공식 결론이 나면서 억울하다는 일부 의견은 상당 부분 희석되었다. 부산에서 진행된 소송에서 1·2심 재판부는 모두 "김 씨가 강박으로 인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토지를 헌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증여의 의사표시는 강박을 이유로 취소할 수 있지만 김씨가 주식을 증여한 1962년 6월 20일부터 10년이 경과할 때까지 증여 행위를 취소했다고 볼 증거가 없으므로 취소권은 이미 소멸했다"고 밝혔다. (사건번호: 2010가합56697) '''군사정부 시절 이루어진 김지태의 개인 재산 기부는 (박정희 정부 및 중앙정보부의 ‘강압’이 일부 있었다 할지언정) '완전한 강탈'은 아니며, 본인이 구속상태를 면하기 위해서 군사정부와 협상을 벌인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사법처리를 받게 된 대기업 회장들이 수천억 원을 사회에 헌납하고 풀려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 대기업 총수야 기업의 자금을 낸 것이고 김지태는 본인소유의 모든재산인 부산일보,부일장학회,부산방송,한국방송을 전재산을 내놓은것이라 바교불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