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수일 (문단 편집) === 근황 및 연구 활동 === || [[파일:external/image.pressian.com/40081205020040(6).jpg]] || 석방 후인 [[2008년]]에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해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간첩이었던 과거 때문에 이전만큼 방송에 많이 나오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다큐멘터리에는 꽤 나오는 편이다. [[뉴스위크]]에서는 그를 가리켜 "분단 시대의 불우한 천재 학자,"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황석영]]도 극찬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1900005/2001/09/001900005200109241201001.html|#]] 수감 중 편지도 명문에 옥중에서 한 '''학문적 연구까지 담겨 있다.''' 반북 성향이 강한 [[조선일보]]마저도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였다. 게다가 수감 중 남한의 아내도 그를 버리지 않았고, 계속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9/29/2004092955154.html|#]] 지금은 '정수일' 본래 이름으로 돌아와 아랍 연구와 [[실크로드]]나 유라시아 관련 연구 책을 쓰며 활동 중이다. 아직도 일부 사람은 그가 간첩이라고 하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위에 언급한 대로 그가 진짜 간첩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북한으로 전달한 문건도 아랍의 역사 및 연구 관련 정보를 많이 보냈기에 북한에서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이딴 걸 뭐 하러 보내느냐?]]"'''고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는 북한 당국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영화 [[모가디슈(영화)|모가디슈]]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슬람권 국가 중에선 남북한과 동시 수교를 한 나라들이 많다. 즉 이슬람권 국가는 남북한의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는 곳으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수일의 연구 성과는 이 지역에서의 외교에 기여할 매우 중요한 자료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무성의 사정이고 정수일이 소속된 [[국가보위성]]의 대남첩보부서는 정수일의 보고가 당장의 직접적인 실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니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부서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장기적으로 챙길 수 있었던 국익을 등한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구금되어 있을 당시 한국 역사학계는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했었다. 사학자들도 그가 보낸 정보도 역사학 자료였으며 그가 가진 지식은 한국 역사학계에 크나큰 재산이 된다고 주장했다. 정수일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아랍 분야 인문학 연구가 남한보다 뒤쳐져 북한 학계가 연구에 참고하길 바라면서 보냈다고 했다. 실제로 북한에서도 같은 사회주의 성향을 띈 아랍 국가들과의 교류에 관심을 가져 시리아, 리비아, 이집트 등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아랍어 학생들을 정책적으로 육성했다. 하지만 북한당국이 정수일에게 원한 정보는 그런 종류의 정보가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전문적으로 훈련된 첩보요원도 아니고 군사나 외교 전문가가 아니다. 때문에 군사 정보 같은 국가기밀 취득을 목적으로 한 간첩으로 부적합했다. 사람을 잘못 골랐던 것이다. 북한이 그를 남파한 뒤 그로부터 얻은 정보와 남파된 그가 전향을 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학계에서 공유 · 발전시킨 정보를 비교해 본다면 북한이 압도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 '''아랍 분야의 천재 학자 한 명을 북한이 그대로 남한에 넘겨준 셈이다.''' 정수일이 이룩한 대표적인 학문적 성과는 다음과 같다. * [[쿠란#s-10.1|쿠란의 표기(코란, 쿠란, 꾸란)]]에 대한 논쟁을 종결시키기도 했다. 이는 그가 대한민국의 아랍 학계에서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대한민국의 아랍 학계에서는 이 쿠란 표기법을 두고 매우 심한 논쟁이 있었다. 쿠란이 필수 아랍어 단어지만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들이 가장 중요한 발음들 - q, r, ء 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수일은 "꾸란"이라는 표기는 틀렸다는 입장을 보이고 "꾸르안"이라는 표기를 사용했으며, 최종적으로 표준안은 "쿠란"이 채택되었다. * [[처용]]의 중동 도래인설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이기도 하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신라의 수도인 금성, 현 [[경주시|경주]]로 제시할 만큼 실크로드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깊고 의미 있는 주장을 제시했다. *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프랑스어, 영어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완역'''하여 2001년 출간했다. 1858년 프랑스어 번역에 이어 1994년 영역본이 나왔다. 정수일이 감옥에서 번역을 완료했을 때는 1994년 영역본의 완성을 알지 못해 세계 두번째 완역본인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자신의 자서전(2022년)에서 세번째 번역으로 바로 잡았다. 프랑스어 번역이 두사람이 5년간, 영어 번역이 한사람이 13년간 번역하다 번역자 사망 이후 다른 사람이 이어받아 23년 후에 출간된 것에 비해 한국어 번역은 1년 9개월만에 완역되었다. 옥중 생활의 약 3분의 1이나 되는 시간을 이 책을 번역하는 데 썼을 정도로 학문적인 열정을 보였다. 더 나아가서 정수일 교수가 한국과 중동 국가(특히 이란)의 관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이 북한 정보를 얻는 중요 라인 중 하나가 이란이다. 특히 이란은 북한 무기를 직접 사 주는 몇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정수일이 직접 북한에 준 남한 정보보다 간접적으로 남한에 준 북한 정보가 훨씬 더 양도 많고 가치는 비교가 안 된다. 사실 정수일이 북한에 준 정보는 지금으로 따지면 굳이 간첩을 파견하지 않아도 평양에서 [[정보전사]]가 VPN으로 우회해서 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정수일은 [[아랍어]]에 능통한 데다 그쪽 지리 및 여러 지식도 매우 많아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아랍 및 이슬람 관련 전문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이슬람 분야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석방 이후의 저술을 보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측면이 종종 드러난다. 사실 그는 [[1963년]] 북한국적 취득 당시 중국에서도 상당한 [[엘리트]]로 대접받는 처지였으면서도 민족적 자존심 하나 때문에 당시 직속상관으로 중국의 '''제1부총리''' 겸 외교부장(장관) [[http://ko.wikipedia.org/wiki/%EC%B2%9C%EC%9D%B4_(1901%EB%85%84)|천이]]와 얼굴을 맞대고서 대판 싸운 끝에 북한 국적 회복을 허락받았을 정도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역사학자로는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정수일은 세계적으로도 권위 있는 이슬람권 역사학자로 극진하게 대접을 받고 있다. 만일 정수일이 계속 북한에 남아서 북한의 중동외교 자문역할을 시켰더라면 북한-중동, 그리고 '''[[북한-이란 관계]]'''가 훨씬 견고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 때문에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가 크게 곤욕을 치렀다. 체포 당시 단국대학교 초빙교수였기 때문. 연세대는 어학당에 다녔던 정도지만 현직에서 교펀을 잡고 학문 활동을 했던 곳인 만큼 단국대학교 측이 훨씬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교내 역사학 교수들 중에서 정수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교수가 종종 있다. 정수일 교수는 동아시아사, 특히 이슬람 관련 역사를 다루는 학문 분야에서는 반드시 전문가로 꼭 언급된다. 실제로, 단국대 사학과[* [[단국대학교/천안캠퍼스|천안캠퍼스]]에서는 역사학과로 부르고 2016년까지 존속되었다. 천안에 있었던 학생들은 2012학년도 이전에 입학한 학생들이었던 셈이다.] 교수들은 당시 한남동 [[단국대학교/서울캠퍼스|서울캠퍼스]]와 [[단국대학교/천안캠퍼스|천안캠퍼스]]를 오가면서 강의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정수일 교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만약에 1984년 이후부터 단국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거나 석/박사 과정을 밟은 사람이 아직도 학교에 있다면 100%다. [[2011년]]에는 중국으로 가서 조카 쪽 가족들과 50년 만에 재회하기도 했으며 모교 방문 등의 활동을 했다. 모교 측에서는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북경대에 진학한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 다른 한 사람은 북경대 철학부에 진학한 임원철로, 역시 문화대혁명 때 북한으로 건너갔지만 정수일과는 달리 불법 도강을 선택했기 때문에 후일 숙청당했다고 알려졌다.]이라는 사실을 알고 바로 정수일과 다른 학생의 사진을 확대해서 학교의 역사 자료관에 걸어뒀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과 재회해서도 정수일의 조카들과 조카 손자들이 [[중국어]]만 하고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자 굉장히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006|#]][* 조선족들은 문혁 이후 중국에 아주 빠른 속도로 동화해 한국어를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담으로 정수일 교수의 이슬람 관련 한국어 번역은 중국 내의 중국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인 [[회족]]들이 이슬람 종교 용어 관련하여 사용하는 한자어 어휘들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비교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쿠란을 한국어로 완역한 최영길 교수의 경우 한국어 필력이 별로 좋지가 못해서 한국어 번역 성경에 나오는 어휘들을 어정쩡하게 사용하는 것을 비판받는 것에 비해, 정수일 교수가 사용하는 아랍어 번역 문구는 깔끔하고 명료한 것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한국에서 잘 쓰지 않는 중국 회족들이 쓰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정수일 교수의 아랍어 번역문이 더 읽기 어려워야 정상인데, 오히려 최영길 교수의 번역문이("읽어보시'''요'''". "파라오족을 익사케 했나니" 등등) 읽기 어색하고 더 어렵다. 2013년에는 2013 경주-이스탄불 세계문화엑스포와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862195&cp=nv|관련 기사 1]] [[http://news.donga.com/3/all/20131010/58133802/1|관련 기사 2]] 고령의 나이에도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2023년 현재에는 자서전 편찬에 주력하고 있으며, 건강상 외부 활동은 삼가고 있다. 그래도 건강한 편인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주관 강의에서 강사로도 가끔 활동하고 있다. [[침착맨]]의 [[트위치]] 방송에서 정수일 교수에 대해 다룬 적이 있는데,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재학했던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어떤 언어로 리포트를 제출해도 괜찮다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언어의 귀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 [[https://www.youtube.com/watch?v=zAuAk-FpYCg|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