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수일 (문단 편집) === 정체 === || [[파일:attachment/정수일/fake.jpg]] || 그러나 사실 그의 정체는 [[중국]] [[조선족]] 출신의 [[북한]] [[간첩]] 정수일이었다. 기존에 알려진 이름, 나이, 국적, 종교, 출신지, 경력, 모국어, 구사 가능한 외국어--7개 언어는 거짓이고 11개 언어를 구사했다--, 학력, 기혼 여부 및 자녀 유무까지 '''모두 거짓이었다.''' 1934년 11월 12일 [[만주국]] [[지린성]] 허롱(길림성 [[화룡#10|화룡]], 1940년에 연길에 편입된 지역)에서 [[조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중국 조선족 최초의 고급중학인 연길고급중학(현 룡정고급중학)에 입학해서 역시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했다.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주 [[모로코]] 중국 [[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외교관]]의 일종으로, 한국에서 외무고시(5급 공무원)를 통과하면 2등 서기관이 된다.)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를 눈여겨본 [[저우언라이|주은래(저우언라이)]] 총리가 인사담당관을 통해 혼담을 주선하기도 했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던 듯하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179쪽.) 모로코 국왕과 중국 고위직 사이의 통역을 맡았던 사진도 남아있다. 이렇듯 중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왔고, 그 스스로도 그대로 살아간다면 부와 명예를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963년 6월에 '''[[중국]] 국적에서 [[북한]] 국적으로 [[귀화]]하였다'''. 당초 중국 내 소수민족 차별에 실망하여 귀화했다고 알려졌으나, 본인은 2018년 신간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 가출판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각한 뒤에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자 내린 결심'''이었다고 밝혔다. [[https://news.joins.com/article/22962868|#]] 본인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인 부모의 영향으로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문에 대해 2022년 자신의 회고록에서 불쾌감을 드러내며 북한으로 간 사유와 과정을 명확히 밝히기도 했다. >이 중론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또 누가 띄워놓은 허깨비 풍문인지, 출처와 진원지는 밝혀진 바가 전혀 없다. 한마디로, 사실무근의 망언으로서 사실에 대한 철저한 왜곡일 뿐만 아니라, 한 인격체에 대한 용납 못 할 모독이다. (중략) 오로지 민족적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성업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겠다는 것이 변곡점의 확고한 변이었다. 그렇지만 나와 중국 측은 이 변의 이념적 바탕에 관해 진정한 민족주의인가 아니면 협애한 민족주의민가를 놓고 맞장~~[[맞짱]]~~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니 승산 없는 짓을 아예 그만두라고 선의의 권유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일찍부터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고 동서고금의 방대한 민족문제 관련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섭렵한 데다가, 외교 일선에서 진정한 민족주의의 정체를 터득했기 때문에 당당히 맞장을 떴으며 (중략) [[저우언라이]] 총리의 공식 허락 하에 합법적 환국을 보장받았다. 진정한 민족주의의 신승(辛勝)에 일말의 자부심을 느끼면서 신념을 더욱 굳혔다. 자신의 직속 상관이었던 '''중국의 제1부총리 겸 외교부장 [[천이]]'''(1901-1972)와 대판 싸우고도 북한으로의 귀화를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에게 [[편지]]로 탄원해서 [[북한]] [[국적]]으로 [[귀화]]하는데 성공했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도망갔던 조선족들은 대부분 종파 분자로 몰려서 숙청당했는데, 정수일은 저우 총리가 공식 발급한 허가증을 받고 귀화한 덕분에 이후 살벌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저우 총리도 정수일과 같은 엘리트 인재가 떠나는 게 아까워서 직접 여성을 소개해 줄 테니 결혼해서 중국에 남아달라고 권유했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북한으로 가게 된다. 중국 소수민족 출신 일개 [[5급 공무원]] 외교관이 자신의 혈통상 모국으로 가겠다고 자진 사표를 냈는데 중국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이 거절해서 격하게 싸우고, 중국의 국무총리가 직접 중매까지 서 주겠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직해서 귀화한 셈이라는 점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비범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중국의 2인자인 저우언라이에게 직통으로 편지를 넣어 탄원을 할 수 있었고[* 즉, 탄원서를 넣기 이전부터 이미 친분이 있었다는 소리.] 그 사람이 허락해 주면서도 아쉬워했다는 것에서도 능력도 비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북한으로 귀화한 후 1974년까지 평양 국제관계대학 교수와 평양외국어대 동방학부 아랍어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아랍어과 학과장까지 맡았다. 정수일은 [[북한]]에서 자신을 일개 어학 교수로 대접하며 매주 1, 2일씩 막노동을 강요하고 매주 25시간, 강의 외의 아랍어 방송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에 힘들어 했으며, 심지어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귀의 미로염(전정신경염)을 앓았다고 한다. 1963년 9월 8일자 [[로동신문]]에는 아랍 대표단 방북 시 '''[[김일성]]의 [[통역]]을 맡는 사진이 보도되기도 했다.''' 평양외국어대 아랍어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정수일의 뛰어난 능력에 관심을 가진 [[조선로동당]]에 의해서, [[1974년]] 9월부터 4년 5개월에 걸쳐 [[간첩]] [[교육]]을 받으면서 남파 간첩으로 변신하게 된다. 1979년 1월 공작금 1만 달러를 가지고 "레바논 국적을 취득해 남한에 잠입해 주요 정세 정보를 수집하라"라는 지령을 받았고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당시 전쟁으로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운 [[레바논]] [[베이루트]]로 향했다. 친북 단체인 '레바논 조선친선협회'와 북한 대사관의 도움으로, [[1979년]] 11월 '무함마드 깐수'(유럽으로 이주했던 실존 인물로 당시 33세.)란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다. '[[간쑤성|깐수]]'는 동방과 이슬람 사이의 교역지 이름이라고 한다. 사실 동방하고 이슬람 사이의 교역지로 유명한 지역 중 깐수와 가장 흡사한 지명인 곳은 간쑤성밖에 없다. 게다가 간쑤성은 이슬람을 믿는 주요 소수민족인 회족과 둥샹족, 그리고 위구르 지역과 가까워서 여기서 유래된 이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레바논 국적으로는 남한에서의 활동이 힘들다는 판단 하에 [[튀니지]]에 입국해 튀니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회 경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기회를 모색하였다. 튀니지는 호적 관계법이 잘 정비되어 있어 국적을 취득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말레이]] 대학 이슬람 아카데미 강사(1982.7)를 거치는 등 호주,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국적 취득 기회를 모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9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 1984년 2월에 필리핀 아버지와 레바논 어머니 사이의 아들인 '무하마드 깐수'로 국적을 세탁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 들어와서 한국어를 배운 것도 당연히 '''전혀 배울 필요 없는데''' 위장을 위해서 '''배우는 척'''한 것이다.[* 남한지역의 말투와 언어습관을 습득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도 추측해 볼 수는 있으나, 보통 북한의 남파간첩 훈련 과정에 남한 말투 학습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확증은 어렵다.] 사실 더 일찍 잡힐 수도 있었다. [[1984년]] 5월에 방을 구할 때 한국의 화폐 단위를 [[대한민국 원|원화]]가 아닌 구 화폐 "[[대한민국 환|환]]"으로 착각해버렸다. 환이 원화로 전환된 것은 1962년으로, 이미 22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때문에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의 복덕방 주인에게 의심을 샀고, 은연중에도 북한 사투리가 강하고 연락처가 없다는 점에서 수상함을 느낀 복덕방 주인이 신고를 했으나 대한민국의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 보증을 해줘서 풀려났다. 이 사실은 수사 기록에도 남지 않은 채 오랫동안 잊혀졌고, '깐수'가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본 복덕방 주인은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1984년 6월부터 [[단파라디오]] 수신기(1993년까지 개인이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었다.)를 이용해 1996년 7월까지 161차례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신했다.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상부에서는 구체적인 첩보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월간 잡지에 나온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신상옥 · 최은희]]의 최근 소재지', '[[빌 클린턴|클린턴]]의 방한', '남조선 학생 [[운동권]]의 최근 동향'[* 당시 정수일은 북한 지도부의 선전과 달리 남한 학생 운동권은 '남한 혁명 운동'의 기수가 될 수 없으며, 재야 운동 역시 활발하나 '혁명의 선봉'으로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1980년대 북한 지도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으나 [[임수경]] 등의 운동권 세력의 방북 이후 교차 검증이 끝난 90년대 이후에는 북한마저도 이들의 정보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 정수일의 표현대로 이후의 NL 운동권 세력의, 북한이 자신들을 높게 평가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연방제]] 통일 지지 행보는 말 그대로 '짝사랑'이 되었다.], '[[K-1 전차|최신형 전차]] 생산 및 첨단 첩보기 도입' 같은 기사들을 편집, 분석하여 중국 [[베이징시]]와 [[선양(도시)|선양]]으로 보냈다. [[1987년]] 2월부터 [[1995년]]까지 4차례 밀입북하여 김일성 부자 충성 맹세문과 "조국 통일상"을 수상하고, [[단파수신기]], 암호표, [[독약]]앰풀, 공작금 19,000[[미국 달러|달러]] 등을 받기도 했다. 흔히 생각하는 첩보 방식과 비교하면 원시적인 행위였지만, 그 당시 이 방법은 굉장히 안전했다. 1996년 2월까지는 암호 편지를 이용해 약 75회 정보를 보냈고 안기부에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겉으로는 영어로 쓴 편지지이지만, 뒷면에 특수 잉크로 정보 보고문이 작성되어 있었다. 이 잉크는 작성 뒤 20분 정도 지나면 육안으로 절대 확인할 수 없으며, 특수 약품 처리를 해야 글씨가 나타난다. 그러다 1996년 3월부터 팩스로 전송 수단을 바꾸는 바람에 잡혔다. 1996년 3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도청(범죄)|도청]]을 통해 '서울 시내 특급 호텔 비즈니스센터 팩스'를 통해 남한의 군사 정치 정보가 외국으로 전송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팩스의 수신지는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이었다. 그래서 안기부는 시내 각 호텔 근처에 CCTV를 설치해 감시했고, 그 결과 비즈니스센터를 이용해 특정 시간대에 북경으로 팩스를 전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안기부는 몽타주를 만들어 시내 각 호텔에 돌리면서 신고를 부탁했고, 결국 [[1996년]] 7월 [[호텔]]에서 팩스를 발송하려고 시도하던 중 호텔 직원 김 모 양(26)이 팩스 고장을 가장해 전송을 지연시키면서 [[간첩신고]]를 해 체포하게 된 것이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바에 따르면 '''첩보 내용만 보면 북쪽에서 도움이 될 만한 가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판결문에도 그런 점이 반영되어 구형인 사형에서 12년형으로 선고되었다. 사실 그가 보낸 잡지나 신문 기사 따위는 정보 분석자의 손을 거쳐 유용한 정보로 사용할 수 있으나, 그런 것들은 일본 혹은 제3국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획득은 어렵지 않아서 북한한테는 있으나 마나 한 정보원이었다. 인간 정보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아무래도 대학 교수보다는 군 간부나 고위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훨씬 유용하다. NL운동권에 대한 정보도 전하긴 했지만, 1990년대 중반이 되면 대학가에서도 현실감각이 없다는 평을 들으며 여론 주도 능력을 상실하는 등 기세가 꺾이던 상황이었고 국회에서도 한 명의 당선자도 못 내던 상황이었다. 이때 NL의 위상이 높게 평가되었던 것은 대졸자가 적어 대학의 위상이 높았던 시절이었던 데다가 학생운동으로 나라를 뒤엎었던 경험이 있었고 대규모 시위에서 몸빵 역할을 적극적으로 맡았고 또한 나름대로의 여론 주도 능력도 있었기 때문에 그 잠재력이나 당위성이 높게 평가된 것이었다. 6.10항쟁에서 김영삼, 김대중 지지자가 시위 참여의 주된 세력이었지만 학생운동의 영향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대학가에서는 진보운동의 세가 컸지만 정작 원내에는 진출하지 못하거나 기성정당에 입당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그대로 북한에 올려보내자 북한 측 정보 담당자에게 "우리가 원한 건 이런 정보가 아니다"라며 외려 지적받았다고 한다. 위장이 철저하다 보니 아내조차도 정수일이 검거되기 전까지는 간첩인 줄 전혀 몰랐는데, 잠꼬대도 아랍어로 했다고 한다. 다만 정수일은 처용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당시 아랍어가 아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웬만한 전공자들과 교류하는 대학 교수로서 10년간 정체를 숨기는 데 성공할 정도라면 일정 수준을 넘는 구사능력이 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철저히 정치적 발언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가끔 가다 무슬림들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코스프레]]까지 하는 등 '''정말 철저했다.''' 또한, 교수로 활동할 당시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과 아랍권 국가가 축구 경기를 할 때면 늘 아랍 국가를 응원했다고. 교수 임용을 할 때도 신원 조회 절차가 있었지만 워낙 치밀하게 위장해 놔서 걸리지 않았으며, 앞서 나왔듯 복덕방 주인의 신고로 조사를 받았을 때도 대한민국의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을 보증해 줘서 별다른 의심 없이 풀려났다. 사실 1980년대는 한국에서 이슬람권으로 가서 일하던 노동자는 상당히 많았지만 반대로 이슬람권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외국인 노동자는 별로 없던 시절이었고, 있어도 사실 그들이 무함마드 깐수라는 인물을 의심할 이유가 딱히 없다. 레바논이라는 나라 자체가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고 또한 [[레바논인]] 이민자들이 중동은 물론이고 중남미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상당한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데다가[* 당장 [[르노]]의 수장이던 [[카를로스 곤]]이 레바논 출신이다. 레바논에서 브라질을 거쳐 프랑스로 정착한 케이스. 현재는 희대의 탈출극이던 [[카를로스 곤 구속 사건]]을 겪은 뒤 레바논으로 재정착.], 필리핀도 [[민다나오]] 섬에 모로족이라 해서 이슬람을 믿는 민족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리핀 출신의 레바논계라는 배경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레바논이 한창 전쟁 중이었던 나라인 데다다 굴지의 산유국도 아니기에 이미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건설노동자나 출장차 오가던 사우디,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리비아 등의 국가들과 다르게 오가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들 사이에서 레바논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은 내전으로 개판이 된 나라라는 인식이 고작이었고,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시기라 외국인을 실제로 접하는 상황도 드문 시절이었기 때문에 필리핀에서 온 레바논인(아랍인)이라고 하면 굳이 의심을 하기도 어려웠다. 정수일은 남한에서 한 결혼이 초혼이 아니었고 '''북한에 아내와 세 딸이 있었다.''' "간첩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이 알고 있었나?"라는 질문에 북한의 조강지처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당시 정수일이 62세로, 아내 박광숙(61, 당시 평양 모란봉극장 안무지도자), 장녀 정미란(33, [[김일성종합대학]] 프랑스과 졸업 후 당시 평양시당 선전국 홍보원), 차녀 정달미(31, 김일성종합대학 문학과 졸업 후 중앙통신사 기자), 삼녀 정소나(30, 평양무역대 졸업 후 당시 무역회사 근무)가 북한에 있었다. 처음에는 무하마드 깐수라고 극구 주장하다가 안기부 수사관이 서류상 고향인 필리핀 [[민다나오 섬]] 사투리(민다나오의 남부 지방 사투리만 해도 4종류가 있다.)를 물어보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후 그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한 듯 자백하기 시작했다. 서류상으로는 필리핀 국적이었다가 레바논 국적으로 귀화했으므로 정수일은 국제법상 국외 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수감된 곳도 구치소가 아니라 출입국 관리법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국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밝혔다. 체포되었을 당시에는 약간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외국인으로 행세 중이었는데, 체포된 이후부터는 취조부터 재판까지 아주 멀쩡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간첩 혐의를 수사하던 담당자들을 놀라게 하는 등. 결국 재판에서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체포 당시, 방대한 자료와 주석을 붙인 《동방교역사(가제)》(출옥 다음 해 《고대문명교류사》란 제목으로 출판)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던 상태였고 , 검사는 그를 취조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형이 구형(求刑)된 후 선고 전날, 검사가 압수당한 원고가 저장된 컴퓨터를 가져다 주어, 검사실에서 몇 시간 동안 정리하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전향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북한의 아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해서였다. 남한에서 만난 후처에게도 '나를 잊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뜻밖에도 후처는 매달 2번씩 면회를 오면서 편지를 계속 교환했다. 둘의 부부 관계는 투옥 이후 새롭게 시작된 것과 다름없었으며, 지극한 옥바라지에 흔들렸다고 한다. 결국 1996년 11월 전향서를 제출했다. 초기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물론 재판부도 사연과 그 동안의 연구 성과, [[전향]] 의사, 그리고 조사 결과 '언론 보도 사실만 북측에 전달했기 때문에 국가 기밀 탐지 혐의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형이 선고되었다.[[http://www.ytn.co.kr/_pn/0422_200907212100060268|#]] 이후 [[2000년]] [[광복절]] 특사로 4년 만에 출소한 후 [[2003년]]에 특별 사면 및 복권을 거쳐 학계로 돌아왔다. 체포된 뒤 단국대에서도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 정수일이 구속되는 바람에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강좌가 폐강되는 등. 제자 대학원생들이 법정에 방청하러 왔는데, 정수일은 그들을 보고 담당 교수로서의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 학부 강의야 강사로 대체한다든지 방법이 있지만 대학원은 실상 교수 하나만 보고 따라가는 것과 다름이 없고 동서문명교류라는 분야 자체가 국내에서 희소한 분야라 그냥 말 그대로 대학원 과정 자체가 붕 떠버리는 것이다. 특히 [[박사]] 과정생들에겐 학위 논문 연구 자체에 타격을 받을 중대한 일이다. 게다가 정체를 생각해 보면, 애꿎게 '간첩의 제자' 소리를 들으며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니 제자들에게 미안해할 수밖에 없다. 단국대 대학원에서는 그의 박사학위를 취소해 버렸는데, 무함마드 깐수라는 거짓 신분으로 행세하며 학교를 속여 받은 학위였고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 불가피한 처사였다 해도 학문을 평생의 업으로 하여 살아온 뼛속까지 학자인 정수일에겐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한다. 이 때 취소된 박사학위는 사면 후에도 [[복권]]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네이버에서 정수일을 검색하면 '베이징대학교 동방학부 학사'까지만 학력이 표기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