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소숙 (문단 편집) == 생애 == 정소숙은 문벌 귀족 중 꽤 이름 있는 성씨인 형양 정씨로서, 당연히 본적은 형양군(滎陽郡) 개봉현(開封縣)이나, 영가의 난 이후로 남천해와 언제부터인가 집안이 대대로 수양현(수춘)에 살았으며, 464년에 정곤(鄭琨)의 손자로 태어났다. 정소숙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 고독하고 가난한 시절을 겪었다. 20대에 정소숙은 안풍현령(安豊縣令)이 되었고 현에서는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이윽고 정소숙은 사주(司州) 주부(主簿)가 되고 치중종사사(治中從事史)로 전임되었다. 495년, 사주 자사였던 소탄(蕭誕)의 아우 소심(蕭諶)이 처형되면서 소탄도 조정에 의해 붙잡히자, 소탄의 측근들은 모두 달아났지만 정소숙은 홀로 난리를 듣고 소탄이 있는 곳으로 간다. 소탄이 죽자 정소숙은 소탄의 관을 호송하여 그 절의를 칭송받았다. 소연이 사주 자사로 부임하자, 정소숙은 중병참군(中兵參軍)으로 임명되었고 소연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았다. 소연은 수도인 건강으로 돌아갈 때 정소숙을 빈객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자, 정소숙은 남기를 청하였는데, 소연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정소숙은 수양으로 돌아간다. 뒤에 소요창이 정소숙을 불어들이려고 할 때 정소숙이 소요창의 부름을 거절하자, 소요창은 이를 거절한 정소숙에게 분노하여 그를 붙잡으려고 하였지만, 누군가가 구명하여 정소숙은 붙잡히지 않았다. 소연이 옹주 자사로 부임하자 정소숙은 옹주로 가서 영만장사, 부풍 태수로 임명되었다. 동혼후 [[소보권]]이 조정 대신들을 살해하면서 소연도 소보권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마침 정소숙의 형인 정식(鄭植)이 소보권을 섬기고 있었는데, 소보권은 정소숙을 회견한다는 명목으로 정식을 옹주로 파견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정소숙은 몰래 이 사실을 소연에게 알렸고, 소연은 연회를 열어 정식을 속였다. 소연이 거병하자, 정소숙은 관군장군이 되었다가 효위장군으로 전임되었으며, 강주(江州)에 이르러 강주의 업무를 맡고 또한 강주와 상주(湘州)의 양곡 운송을 맡았다. 소연은 이후 소보권을 폐하고 소보융을 세웠으며, 502년에는 소보융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양(육조)|양나라]]를 건국한다. 이가 양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양)|양무제]]이다. 양나라가 건국되자, 정소숙은 위위경으로 임명되고, 모친상을 당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관군장군, 우군사마가 되었으며 영도현후(營道縣侯)로 책봉되었다. 정소숙은 얼마 안 있어 위위경, 관군장군이 더해졌으며 작위가 동흥현후(東興縣侯)로 바뀌었다. 504년, [[북위]]가 합비를 포위하자, 정소숙은 군대를 이끌고 동관(東關)에 주둔하였고, 505년에는 사지절, 정로장군, 사주 자사가 되었다. 507년, 정소숙은 좌위장군이 되었고 통직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사예(司豫) 2주의 대중정을 겸하였다. 정소숙은 508년 사망하여 산기상시, 호군장군으로 추증되고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