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성공 (문단 편집) == 현대에서의 평가 == > '''"1,000년이 지나도, 세상은 이 일을 이야기하리라" ''' > - 장황언(張煌言. 1620∼1664) '''[[대만사|대만 역사]]에 처음으로 이름을 떨친 [[대만인]]이다.''' 대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맨 처음에 언급되는 인물은 대부분 이 사람이다. [[대만 원주민]]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정성공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만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만한 일도 없다시피 했다. 허나 정성공은 대만을 복명반청의 기지로 생각했을 뿐 자기 자신은 철저히 중화인으로 생각한 [[중국인]]이었다. 이런 점은 나중에 대만을 통치하지만 평생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던 [[장제스]]와 비슷하다. 타국의 사례에 비교하자면 [[영국인]]으로써 [[싱가포르]]의 개척자인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와 비슷하다. 정성공 본인의 행적을 보면 절망적인 정세하에서 삼번의 왕들처럼 청나라에 충성했더라면 보장되었을 부귀영화를 준엄하게 거부했다. 그런데 아버지 정지룡이 순순히 항복했다가 받은 대우나 [[삼번의 난]]을 보면 정말 부귀영화가 따라왔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민족인 청나라와 계속해서 투쟁을 벌이고, 명나라의 영토를 회복하며 황제를 다시 옹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 때문에 마지막까지 명나라와 주씨 황제를 위해 충성을 바친 충신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정성공은 남송 시대의 비운의 명장 [[악비]]와 더불어 '명나라의 악비'로 평가되고 있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원숭환]]처럼 절망적인 정세하에서도 끝까지 명나라 황제에게 충성한 점 때문인지, 청나라에서도 정씨 가문의 충심을 높이 사 보복을 하지 않았고 현재 중국에서도 [[관우]], 악비, 원숭환과 같이 꽤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평가도 상당하다. 끝까지 청나라에 항전하려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의외로 [[충신]]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면이 많다. 명나라 [[황실]]에 대하여 존대하긴 했지만 실제 권력은 정씨가 잡은, 이른바 후한말의 [[조조]]와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다른 반청 저항군 통솔자인 [[이정국]]에게도 제대로 협력하지 않았다. 이때 이정국은 100,0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광동을 공격했고, 그 맹렬한 공세에 [[순치제]]도 버티지 못해 장강 이남은 포기하자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때 이정국은 정성공에게 협공 좀 해달라고 편지를 9통이나 보냈지만, 정성공은 이걸 무시했다. 청나라라는 외적을 물리치면 본인이 할거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지원을 받지 못한 이정국의 공세 작전은 실패했고, 반청복명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 다만 정성공은 융무제를 받들었고, 이정국은 [[영력제]]를 받들었으며, 이정국도 정성공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정성공의 힘을 소진시켜 자신의 위치를 강화시키려던 것도 있었다. 어차피 [[장헌충]]을 따라다니던 도적 출신의 이정국이나, 해적 출신의 정성공이나, 다 도긴개긴이니 누굴 잘했다, 잘못했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겉으로라도 반청복명이라는 대의를 내걸고 공통된 적을 상대하고 있었던 능력있는 이들 두 사람이 서로 한 발씩 물러나 협력했더라면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일이기에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또한 자기 잇속을 채우기에 우선인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다. 특히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으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랑(청나라)|시랑]]이었다. 정성공은 유능한 장수와 반목하여 그를 청나라에 귀순하게 하여 스스로 패배 플래그를 세웠다.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정성공 본인은 중국에서나 대만에서나 모두 동기나 인성, 그리고 행적은 무시한 채 [[결과는 좋았다|어쨌든 네덜란드 손에서 대만 섬을 탈환했다]]고 여기며 그 사실 하나만 보고 대만 탈환을 달성한 [[중화민족]]의 영웅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따지고 보면 대만 정복도 반청복명이라는 민족적 대의보다는 근거지 확보같은 현실적인 원인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만에서는 높게 평가받고 있으며, [[타이난]]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학도 세워졌다. 학교명은 [[국립성공대학]]. 대만의 명문대 중 하나이다. 그리고 [[신병훈련소]]인 [[성공령]]도 정성공의 이름을 땄다. [[중국 본토]]에서도 그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대만은 우리땅 → 우리 땅을 먹은 나쁜 네덜란드 놈들 → 나쁜 놈들을 조진 정성공은 영웅'이라는 논리이다. 정성공이 네덜란드를 물리치는 내용을 다룬 영화가 나왔을 정도. 현재까지 대만 독립 문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 중국과 대만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반청복명을 외치던 조선에서도 정성공을 굉장히 좋아했으며, [[인조]]에게 실망한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청나라에 항복하여 명나라를 배신한 인조를 정성공이 징벌하러 올 것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고, 숙종 때도 [[장길산]]의 역모 사건때 >"바다에 사는 정씨가 장길산을 도우러 올 것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것이 훗날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의 원형으로 추정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대만 섬이 중국 대륙의 한족과 본격적인 관련을 맺게 된 계기가 이 사람이기에 [[대만 독립운동|대만 독립 세력]]들은 정성공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대만 내 독립파 중에는 비슷한 이유로, 중화민국의 국부였던 [[쑨원]]에 대해서도 영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대만에서는 정성공이 처음 상륙한 4월 29일에, 매년 [[타이난]]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서 기념 행사를 거행하고 있는데, 독립 성향 인사들의 비판적인 시각 때문에 이 행사의 위상도 다소 묘해지고 있다. 차이잉원 정부의 집권 2년째인 2017년 행사에는 그동안 중앙정부의 내정부장(한국의 행정자치부 장관격)이 참석, 주관했던 것이 타이난 시장 주관으로 격하되었다. 타이난은 대만에서 [[민주진보당]]을 비롯한 [[대만 독립운동|대만 독립]] 세력이 초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다. [[대만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나뉘는 편이다. 위의 대만 독립 세력과 비슷하게 한족 [[식민주의]]와 대만 원주민 탄압의 시작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정성공은 해적으로서 대만 원주민이나 친청파 중국인, 그리고 [[유럽인]]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기도 했다. 반면 정성공이 대만을 정복하면서 네덜란드의 지배를 당하고 있었던 원주민들을 해방시켜주고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명나라 유민 세력인 중국인들과 대만 원주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고,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기에 꽤 호의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원주민들이 산골짜기로 쫓겨나게 된 건 동녕 왕국과 다두 왕국의 멸망 이후 청나라가 대만 섬을 다스리면서 한족 불법 이민이 본격화한 이후였다. 이런 이유로 2016년에는 [[차이잉원]]이 정성공의 원주민 학살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또한 근래에는 동상이 먹물테러를 당하고 '정성공의 영혼이 꿈에서 원주민 학살에 대하여 사과했다'는 황당한 내용의 뉴스까지 뜰 정도이다. 다만 대만 원주민은 한족에 완전히 동화된 평지 원주민을 제외하면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대만에서 위인 대접을 받는 정성공에 대한 평가 자체가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본인과 중국인의 [[혼혈]]인이었던 정성공이 정복한 대만은 이후 [[청나라 치하 타이완 섬|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일본 제국|일제]]의 [[식민지]]가 [[대만일치시기|되는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속에서 정성공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에 의해 각자의 관점으로 평가받아 왔다. 오늘날 [[중화사상|중국 민족주의]]에서는 본토나 대만 할 것 없이 정성공이 대만 섬에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냈다며 고평가를 하기는 하지만, 대항해시대 당시 네덜란드는 이웃한 포르투갈이 선점한 아시아 식민지들을 뺏어와야 하는 입장이라서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식민지 현지인 특히 중국인들에게 '''비교적''' 잘 해주는 편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 잘해준 것이었고 착취나 학살 등 이런저런 나쁜 짓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대만 원주민들은 사탕수수를 기르는 법은 알아도 사탕수수를 정제해서 설탕으로 만드는 법을 몰라서 대만의 네덜란드인들 입장에서는 중국인들을 데려와야만 수월한 설탕 생산이 가능한 이유로 중국인들에게는 그렇게 함부로 모질게 굴지 못하던 편이었다. 나중에는 네덜란드령 대만의 중국인들이 벼농사가 불가능한 언덕배기에 차밭까지 만들었다. 애초에 정성공의 대만 정복 이전 네덜란드령 대만은 네덜란드인들과 중국인, 현지 원주민들이 서로 견제하며 갈등하던 사회였다. 이는 중국인들이 네덜란드령 대만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원주민들이 앞장서서 중국인 반군을 토벌한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정성공의 대만 정복은 대만 내에서 한족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대만의 중국화를 촉진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대만 해군|중화민국 해군]]의 호위함(frigate) 중에 --[[천궁(파워서플라이)|뻥궁]]-- '[[청궁급 호위함|청궁급]]'(成功級)[* 미 해군의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의 라이선스 생산형, 정성공 외에도 [[척계광]], [[악비]]와 같은 중국 여러 시대의 무인의 이름을 따와 함명을 붙였다.]이 존재한다. [[중국 해군]]은 이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포함하여 앞으로 취역할 [[항공모함]]에 [[시랑(청나라)|시랑]]을 함명으로 붙이기로 했으나 결국 취소되었고 실제 항공모함 이름은 [[랴오닝(항공모함)|랴오닝급]]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 해군에도 해사생도 훈련함으로 정성공함이 존재한다. 즉 양측 해군에서 모두 함명으로 붙여 기릴 만큼 존경받는다는 의미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KoxingaTemple.jpg]] 타이난(臺南)에 있는 정성공을 모시는 사원 중국에서도 정성공 탄생 380주년인 2004년에, [[http://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60121000988627#hedaer|정성공의 동상]]을 세웠다. 38m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기마 동상'이었으나 2010년 40m 짜리 [[칭기스 칸]] [[동상(조형물)|동상]]이 [[몽골]]에 세워지면서 기록이 [[http://blog.daum.net/pzkpfw3485/2242764|깨졌다]]. 사실 38m라는 높이는 [[자유의 여신상]]만 해도 48m, 세계 최대 동상인 중국 [[허난성]]의 황금 부처상 128m에 비교하면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