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성공 (문단 편집) == 그 이후 == 끝내 정성공이 사망함과 동시에 반청복명의 기치는 장식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영력제 처형 이후의 새로운 명나라 황제도 옹립되지 않게 되었다. 정성공의 후계자인 정경이 새 명나라 황제 후보자를 왕으로 봉해 대접하긴 했다. 오히려 정성공 사후엔 동녕 왕국이 청나라에 대해 조공국으로 받아달라고 애걸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정성공의 아들이며 제2대 왕인 [[정경(동녕 왕국)|정경]]은 [[삼번의 난]] 때 청나라에 반기를 든 [[오삼계]] 세력에 호응했고, 본토 수복을 위해 군대를 보내 일시적으로나마 [[복건성]]을 다시 차지하기도 했으며, [[천자]]로 모시는 명나라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씨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지는 않고 [[제후]]를 계속 자처했으니 반청복명의 기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경이 확보한 복건성 영토는 [[경정충]]과 청나라군에게 잃었고, 이에 실의에 빠진 정경이 1681년에 승하하자 동녕 왕국은 정경이 지명한 후계자인 [[정극장]]과 정극장의 동생인 [[정극상]] 간의 내분('''동녕의 변''')으로 인해 조금씩 몰락하게 되었다. 정성공의 손자인 정극상 대에 가서 세력이 완전히 분열된 뒤, 1683년 [[강희제]]가 정성공 휘하의 장수였던 [[시랑]]에게 지휘를 맡겨 해군을 편성해 대규모 남정을 실시하자 중과부적으로 [[펑후해전]]에서 패배해 정극상이 항복함으로써 동녕 왕국은 [[멸망]]했다. 이후 [[1732년]] [[옹정제]]의 통치 때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한족의 군사작전인 [[대갑서사항청사건]]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다두 왕국도 멸망했다. 그래도 청나라는 정성공과 그 후예의 명예를 인정했고, 항복 이후 정씨 왕족들은 청나라 본토에서 그럭저럭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정성공은 일본에서 무역 전담항인 인공섬 [[데지마]]가 만들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정성공이 [[설탕]] 등의 무역 품목들을 독점하고, 폭리를 취해 [[동중국해]]의 무역을 주름잡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반발하게 되었고, 이것이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쳐 포르투갈은 아예 일본에서 철수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