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성공 (문단 편집) === 성장 === 당시 [[동아시아]] 지역은 이민이 빈번하여 일본의 히라도, 필리핀의 [[마닐라]], [[베트남]] 등지에 모두 중국계 [[화교]] 이민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인 이민도 활성화되어 [[남양군도]] 및 [[인도차이나 반도]]에 두루 퍼져있었다. 이러한 초국가적인 이민 활동은 공식적인 조공 무역과 함께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가장 중요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유럽]] 국가들도 사치품 무역 네트워크에 가담하여 동아시아 해역은 여러 세력이 각축하는 혼돈의 해역이 되었다. 히라도의 거리에서 성장하던 정성공은 난데없이 [[정지룡]]의 궁궐과도 같은 집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 7살이던 정성공은 당연히 향수병과 어머니 다가와 마츠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렸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씨다른 동생과도 어려서 친했던 사이였기에 편지로 계속 교류했다고《대만외지》를 비롯한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정지룡은 자신의 장남이었던 후쿠마츠에게 '''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이름은 다가와 마츠가 정성공을 임신했을 때 정지룡 자신이 지어주었던 이름이었지만 정지룡이 중국에 건너가면서 쓰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또한 큰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대목'''이라는 자도 내려주었다. 정지룡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언어를 배우며 자기 세력을 키운 데 반해 안정적인 삶을 유지한 편이었다. 정성공은 유가적인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편으로 14세 때 수재에 합격하기도 했다. 정성공은 15세가 될 때까지 안해의 정씨 가문 저택에서 성장했는데 이 시기에 정지룡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라서 아버지를 자주 보진 못했고, 중국인 [[유모]]와 [[계모]], 그리고 정지룡의 삼촌들의 손에서 자랐다. 정지룡은 당시 명나라의 관리이긴 했지만 이는 밀수와 해적질로 쌓은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명나라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정성공은 그저 아버지를 명나라의 충신이자 수군 제독으로만 알고 자랐다. 아마 아버지를 높여주려는 주변 인물들의 아부였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정성공의 훗날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명]] 정권은 군권을 장악한 정씨 집단에 의지하여 정씨에게 국성인 주씨를 사성하고, 정지룡의 아들에게 '''성공'''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정성공의 이름과 '국성야'라는 칭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정지룡은 아들 정성공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돈과 군사력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 즉 가문의 명예를 정성공에게서 얻고자 했다. 정지룡 본인은 자신의 무역 왕국에 대한 관심이 그 어떤 정권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이었다. 그랬기에 동향의 권유로 정지룡은 청나라에 투항했다. 정성공이 이를 만류했으나 거부당하자 정성공 자신은 이탈했다. 정지룡은 청나라 조정이 남방 3성을 관할하게 해줄거라 기대했지만 청군은 약속을 어기고 정지룡을 [[베이징]]으로 압송했다. 정지룡은 정성공에게 어렸을 때부터 유교 경전들을 가르쳤고, 무술도 가르쳤는데 결과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정지룡의 교육으로 정성공이 충의를 다해 반청복명 운동에 투신하여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정지룡이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