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석원(음악인) (문단 편집) === [[1990년대]], [[015B]]의 발족 === ||<-2>[[파일:external/cythumb.cyworld.com/file_down.asp?redirect=%2Fp41701%2F2006%2F3%2F24%2F18%2F04%281302%29.jpg|width=100%]]|| || 공일오비 콘서트 준비 당시 정석원 || 1990년, 무한궤도의 해체 후 솔로로 데뷔한 신해철[* 무한궤도가 계약 기간 내에 해체 시 나머지 계약 기간을 본인이 솔로 앨범으로 채워야 하는 계약조건이었다고 한다.]과 별개로 무한궤도의 소속사였던 대영AV에서 친형 장호일[*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본명은 정기원]과 역시 무한궤도의 [[베이시스트]]였던 고 조형곤[*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서 정석원과 코드가 맞았다고 전한다. 훗날 015B [[가스펠]] 음반이 나오게 된 배경, 015B 4집 이후 [[버클리 음대]] 유학으로 015B 탈퇴, 이후 그의 친형인 조형민과 함께 '삶사람사랑'이라는 2인조 [[CCM(음악)|CCM]] 그룹으로 활동하였고 [[백석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2020년 7월 25일 사망.]과 함께 015B 결성 후 데뷔, 015B라는 이름은 U2나 UB40 같은 영어와 숫자가 혼합된 이름을 짓고 싶었던 그들이 과거 몸담았던 무한궤도의 이름을 약간 바꿔 015B로 이어왔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무(無)=0 한=1 궤도(orbit)=5B] 015B의 1집 작업 당시 소속사의 지원과 기대가 부족했고, 소속사에서 015B라는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 못해, 녹음실에서는 "궤도이탈"로 불렸다고. 이 시기까지만 해도 그들 또한 다른 무한궤도의 멤버들처럼 전업 음악인으로서의 데뷔를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친형인 정기원의 경우 '나라기획'이라는 광고회사를 다니며 동시에 이를 숨기기 위해 본명인 정기원 대신 "[[장호일]]"이라는 사촌의 이름을 가명으로 썼다고 한다. 1집 "015B"는 발매 초반 큰 반향이 없었으나 [[타이틀곡]] "[[텅 빈 거리에서]]"가 라디오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 30만장 판매라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거두자 2집 발매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2집 때는 무한궤도의 멤버였던 조현찬이 [[드러머]]로 합류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015B는 언제 해체될지 모르는 팀이었고, 프로뮤지션이라기보다는 대학 [[동아리]] 같은 느낌의 팀이었다. 이들은 라디오를 기반으로 입소문을 타며 매니아들의 인기를 조금씩 얻고 있었다. 015B는 1993년, 3집 "아주 오래된 연인들"을 발표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고, 015B의 거의 모든 곡을 작곡하던 정석원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프로듀서이자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1990년대 초반 015B 뿐만 아니라,이승환, 윤종신 등의 음반에 크레딧을 올렸고, KBS 드라마 <연인>의 OST를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이 시절, 단 한 사람의 작곡가가 매 앨범마다 각기 다른 여러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수록하고 그것도 빼어난 멜로디 감각으로 친숙함마저 겸비하여 대중 앞에 내놓자, 열광적인 반향이 뒤따랐다. 당시 유행하던 [[PC통신]]상에서 '[[작곡]]계의 [[독재자]]', '[[황제]]'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였다.[* 강준만이 <한국 현대사 산책>이라는 책에서 그를 [[서태지]]와 비슷한 반열에 올릴 정도.] 특히나 절정의 인기를 누린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수록된 015B 3집부터 5집까지의 활동 시기가 가히 정석원 본인의 리즈 시절이라 부를 수 있는데, 한국 대중음악의 절정기로 불린 1990년대에 소위 신세대의 대변자로 불렸던 [[서태지]]가 당대 10대들의 감성을 대변한다면 015B는 그보다 조금 높은 연령대인 20대([[X세대]])들의 감성을 대변하는 한 축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015B 음악의 핵심이었던 정석원은 앨범마다 수없이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면서도 대중성과 음악성을 절묘하게 조합시키는 솜씨가 빼어났다. 그런 실험적 시도 가운데에서도 앨범마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는 감성적인 발라드들이 항상 2~3곡 이상 배치되었는데, 본인이 스스로 존경한다고 밝힌 [[데이비드 포스터]]의 영향을 받아 세련된 편곡과 더불어 그 시대 대중의 감성코드를 잘 잡아낸 이 발라드 곡들이 팀의 인기를 유지시키는 요소이기도 하였다. 훗날 015B와 유사한 컨셉의 프로듀서 중심 그룹 [[토이]]를 성공시킨 [[유희열]]도 앨범의 곡 구성에 있어서는 이러한 정석원의 앨범 곡 구성과 컨셉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015B 2집 60만 장, 015B의 3집부터 5집까지는 모두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고 4집에서는 [[가요톱10]] [[골든컵]]도 015B의 이름으로 수상하였다. 한편으로 작곡가 및 프로듀서로서도 활발히 활동, 윤종신, 이장우, 성지훈, 김태우 등 015B 객원가수 출신들의 음반 및 드라마 "연인", "파파"의 O.S.T에 참여했고, [[이승환]]과의 친분으로 당대의 명반인 이승환 3, 4집의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하여 음악적 역량을 과시하였다. 특히 4집 "[[Human(이승환)|HUMAN]]의 경우 그때나 지금이나 음악적 퀄리티를 위해 돈을 쏟아붓는 성향의 이승환과 함께 [[미국]]에 가서 [[벡 한센|David Campbell]] 등의 프로듀서 및 해외 세션과 함께 작업하는 등 당대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문법을 새롭게 쓴 이 앨범 작업과정의 전반을 함께했다. 자연히 "천일동안", "악녀탄생" 등의 곡에서 정석원 본인의 음악적 색채 또한 짙게 드러나있다. 하지만, 정석원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과도한 관심과 음악평론가, 네티즌 등의 공격에 많이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가요계 은퇴를 결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96년, 그간 몸담아 왔던 유재학 사장의 대영AV에서 새롭게 음반시장에 참여하고자 했던 대기업 계열사인 LG미디어로 이적하였다. 정석원은 가수활동 은퇴를 결심하고 마지막 앨범인 "[[The Sixth Sense]]"라는 부제로 015B의 6집을 발매했다. 이번엔 팬들에게 대한 작별의 의미를 담은 이장우의 발라드 "나 고마워요"를 제외하고는 현대 클래식을 가져온 "작곡과 출신" 유희열의 도입곡 "일식"부터, [[인더스트리얼]], [[헤비메탈]], [[테크노]], [[일렉트로니카]] 등 비주류 장르의 조합으로 미친듯이 질주하는 당대의 문제작, [[독일]]의 바우하우스 운동의 재현을 표방하며 소위 "음악 장인"으로서의 역량을 과시했다. 앨범 판매량은 24만 장으로 대중적으로는 명백히 실패했지만[* LG의 손해도 막심했던 듯, 오디오 구매 시 테이프를 사은품으로 주었다는 목격담도 있다.] 훗날 정석원과 함께 작업한 박정현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데뷔 시(1996년) 감상했던 국내 음반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한국 대중음악 앨범으로 꼽았고, 당시와 이후에도 이 앨범에 대한 많은 평론가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음악성에 있어서는 당대 주류 작곡가 중 최고 수준임을 새삼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성과물이다. 그리고 정석원은 6집 발표 이후 그해 하반기부터는 가수로서 은퇴했고 방송이나 언론 활동을 중단하고 프로듀서, 작곡가로서의 활동만 이어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