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묘호란 (문단 편집) == 강화 == 후금은 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사신을 보내 조선에게 강화를 요청했고, 백성들에게도 후금군은 강화를 원하는데 너희 조정이 우리를 무시한다는 식으로 선전하면서 조선 조정을 압박했다. 조선 조정은 후금측의 강화 요청을 계속 무시하다가 결국 후금군이 고속으로 전진하여 황해도 평산까지 도달하자 나서야 강화협상에 응했다. 겨우 10여일만에 후금군은 황해도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일단 후금은 2월 평산에서 멈추고 강화도에 있는 조선 조정과 계속 사신이 왕래하였으며, [[3월 25일]](음력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것을 요구했다. 결국 후금군은 유해(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해, 청사고에서는 유흥조로 기록되어 있다.), 강홍립 등을 보내어 사정을 설명하게 했다. 후금 사신단의 일원으로 온 [[강홍립]]은 조정에 후금의 내부사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장기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 조정측에 설명했으며, 이에 따라 인조와 조선조정은 주전론을 펴는 언관들의 반론을 물리치고 후금과의 화의를 모색한다. 여기에 후금 사신 유해는 명나라 항장출신으로, 협상이 결렬 위기를 맞았을 때, 제3자적 입장에서 조선측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개인서신을 인조에 보내 위기에 빠진 협상을 구해냈다. 이후 조선이 은, 면 등으로 구성된 배상금을 낼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협상이 다 이루어졌을 때, 조선측에서 보낸 국서에 명나라 [[연호]]인 [[천계]]가 있었는데, 이를 본 후금군 총사령관 [[아이신기오로 아민]]이 발끈했고, 그의 뜻을 받든 유해가 구체적으로 조선에 요구한 기록이 여럿 있다. 특히 유해는 "발끈 성을 냈다(勃然生怒)."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화를 냈는데, 조선 조정의 해결책은 시비붙지 않게, 답서 보낼 때 그냥 연호를 생략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는 조약을 맺고 4월 18일(음력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화의에 따른 공물을 제공하는 한편, 종실인 [[원창군]][* [[성종(조선)|성종]]의 아들 운천군의 증손으로 원래는 부령(종친부 종5품)이었던 이름뿐인 왕족이다.]을 왕의 동생으로 속여 인질로 보냈다. 후금군도 결국 철수하였다. 볼모로 후금측에 갔던 원창군은 몇년후 조선측에 무사히 귀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