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묘호란 (문단 편집) == 전개 == [youtube(vrLtfRX0hlI)] 1627년 2월 23일(인조 5년 음력 1월 8일), 초봄에 아민이 이끄는 후금군 3만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사르후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실록을 보면 후금의 길잡이로 돌아온 [[강홍립]]을 두고 조정에선 "얘를 죽여 살려" 하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결국 [[인조]] 선에서 삭탈 관직으로 정리되었다.] [[선양(도시)|심양]]을 출발해 조선을 침공한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3월 1일(음력 1월 14일) [[의주군|의주성]]을, 3월 2일(음력 1월 15일)에는 [[정주군|정주성]]을, 3월 8일(음력 1월 21일)에는 [[안주군|안주성]]을 점령했으며, 3월 10일(음력 1월 23일)에는 [[평양시|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청군에게 장악된 것이다.[* [[병자호란|이로부터 9년 뒤에 치른 전쟁]]에선 아예 큰 길을 타고 한양으로 요격했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평양시|평양]] 등지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후금군에게 패하면서 그 본진이 [[개성시|개성]]까지 후퇴하였다. 인조를 포함한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시|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후금을 향한 공세[* 즉 당시 후금은 [[양면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와 더불어 [[정봉수]](鄭鳳壽, 1572년 ~ 1645년)라는 무관이 의병을 모아 [[평안북도]] [[철산군]]의 용골산성에서 후금군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평안북도 [[용천군]]의 이립(李立, ? ~ 1627년)도 의병을 모아 후금군의 배후를 위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