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 (문단 편집) == 평가 == 냉철한 지성과 강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혁명적 사상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감정적이고 [[덜렁이|덜렁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나이가 들어 문득 불쌍해 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면 자리를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대성통곡했다는 기록이 있어 감정 표현에 솔직한 인물임이 드러난다. 또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했는데 말을 몰고 가는 하인이 "대감, 서로 다른 신발을 신고 나오셨습니다"라고 지적하자 정도전은 "상관없다. 이렇게 말을 타고 가면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오른쪽 신발만 볼 것이고,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왼쪽 신발만 볼 테니까."라고 웃으며 그대로 짝짝이로 신발을 신은 채로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공양왕]] 시절에는 반([[反]]) 이성계파 인사였던 [[우현보]]를 탄핵하려던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이성계 일파의 참모진들 외에는 기밀사항이었다. 그런데 이를 실수로 주변 사람들에게 흘리는 바람에 반이성계파 대간들이 이를 두고 정도전을 집중적으로 탄핵했고 결국 공신녹권 박탈에 유배까지 당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권신]]들과 감정적 대립 역시 심했고, 그가 [[우왕]] 대 복직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른 [[신진 사대부]]들이 하나 둘 현실과 타협했지만 혼자 끝까지 버틸 정도로 고집도 질겼던 모양.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부로를 훈시하던 오만함이, [[유배]]된 부락의 천인들과의 정서적 교류, 그들의 지식과 지혜에 대한 파악과 이해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다. 이후 백성을 중시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사고관이 자리잡게 된다. 다만 주변사람과 충돌하고 과격하며 타협을 모르는 면모는 이후로도 여전했으며, 한번 가진 은원은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철저히 갚는 면모도 있었다. [[삼국지]]의 [[법정(삼국지)|법정]]과 유사한 점이 많은데 전반적으로 프로 [[어그로]]꾼 성질이 매우 다분한 인물이었다.[* [[경복흥]], [[이인임]] 같은 조정의 권신들과 대립하다가 유배당했는데 거기서 또 악에 받힌 소리를 하고 떠나서 곤장을 맞을 뻔하기도 한다. 유배지에서 백성들에게 가서도 그랬다가 반성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와 [[삼각산]]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칠 때도 [[혹세무민]]하는 요망한 인간을 매우 까는데 같이 까던 승려도 "[[석가모니]]나 저놈이나 다를 게 뭐냐?"는 식으로 면박을 주기도 하였다. 이렇듯 젊은 시절 성격 문제로 정치 일선에 물러나는 바람에 안정적으로 관료 생활을 했던 라이벌 정몽주나 조준과 달리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나갈 정치력을 기르지 못했다. ] 졸기에서도 처음에는 스승과 동문들 간의 사이가 두터웠으나 나중에 원수 같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조선 개국에 반대한 [[이색(고려)|이색]]과 그 동문들은 작정하고 작살냈다. 스승인 [[이색(고려)|이색]]이나 동문인 [[이숭인]] 및 정몽주와는 나중에 원수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이숭인은 유배지에서 정도전이 보낸 사람에 의해 맞아 죽었다. 동문 후배인 [[하륜]]은 "술수하는 자 따위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까기도 했다. 또 확실히 입증이 되지도 않은 자기 집안의 속설을[* 정도전의 모계 혈통이 [[우현보]] 집안의 노비 혈통이라는 것.] [[유언비어]]화시켜서 승진을 막고 평소 자신을 음해하고 조롱하며 모욕감을 준 [[우현보]]의 집안을 작살냈다.[* 우현보의 다섯 아들 중에서 세 명을 곤장형으로 [[황천]]으로 보내버렸다. 덕분에 현대에도 우가는 정가와 혼인 하지말라고 가르친다.] 가장 압권은 스승 이색이 조선 개국 이후 유배를 갔을 때인데 정도전이 외딴 섬인 자연도로 보내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경기 계정사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자 "섬에 귀양 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참고로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이색을 육지로 유배 보내준게 태조였다. 이 때문에 많은 반감을 샀으며 1차 왕자의 난 때 이 성격으로 미움받아 죽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지인 [[남은]]이 말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러한 숙청들을 단순히 개인적인 앙금으로만 치부하는데에는 문제가 있다. 도덕 문제는 둘째치고, 우현보의 집안은 이성계를 위시한 역성혁명파의 대표적 반대파중 하나였고 이색과 그 동문들 또한 혁명파와 적대적이였다. 고려를 없애고 조선을 세웠다 하나 아직 고려를 지지하는 세력이 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순히 개인적 앙금만으로 숙청했다 보는건 극단적인 견해이다. 물론 숙청의 정도에 정도전 개인의 감정이 어느 정도는 들어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조선 건국 이후 권력을 쥐게 된 이후에 다소 무리수를 두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같은 사신단으로 갔던 이들 가운데 홀로 명나라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이유로 [[권근]]을 탄핵한 것. 아마 권근이 이방원 측 사람이었기 때문에 견제하기 위해 취한 행동으로 보이는데, 애초에 표전문 사태로 인해 정도전 본인이 명나라로 가야했던 것을 권근이 정도전을 대신하여 명나라로 갔던 것인지라 되려 이성계한테도 한 소리 듣고 각하 당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4020_001|#]] [[사병#s-2|사병]]([[私]][[兵]]) 혁파는 조선의 안정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 없이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완성이 불가한 것은 물론, 나이 어린 [[이방석|방석]]이 세자가 되며 더욱 시급한 일이 되었다. 어리고 세력 없는 세자에게 사병과 세력을 갖춘 형제들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에 왕자들의 사병과 권한을 빼앗았으나 그 과정이 치밀하지 못하여 결국 이방원이 외가의 사병을 통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하니, 그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대로 공신과 종친을 장악하지도 못했으면서 사병 혁파를 추진했다고 비판하지만, 애초에 정도전 혼자서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혁을 끌고나가는 마당에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사병 혁파의 당위성이 아니라 누가 사병 혁파를 지휘했는지이다. 사실상 사병 혁파를 실패한 원인 자체가 정도전이 주도했기 때문인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정도전 사후 태종이 다시 사병을 혁파하려 했을 때는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노리고 한 짓이라는 게 뻔한데 왕자들이 그리 쉽게 자기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사병을 내줄 리가 없다. 그리고 나중에 가면 아예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라는 말이 나왔고(물론 이는 이방원 일파의 [[프로파간다]]이기도 했을 테지만) 또, 이게 실제로 먹혔을 정도니 반발이 어느 정도였을 지는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요동 정벌 자체도 실제로 명과의 전면전을 추진했다기보다는 명에게 보내는 경고성 제스처에다가 [[북벌론|덤으로 이를 명분삼아]] 군제개혁을 이끌어내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전은 왕이 현명한 [[재상]]을 통해 나라를 통치해야 함을 주장하였으나, 왕을 제멋대로 흔들거나 [[하극상]]을 벌여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유학자이자 고려의 타락을 보다 못한 정도전이 이를 주장할 리가 없는 것이며, 고려 도당에서 정치에 잔뼈가 굵고 말 그대로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할 권력을 쥔 태조 이성계를 상대로 이것이 가능할 리도 없다. 정도전이 단독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개국 초기의 조선에 아직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따름이다. 이 시기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워버린 권신 이성계와 그의 측근들[*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이 밀실에서 정책을 논의하고, 그대로 추진해 버리기도 했으며, 한양 천도, 세자 책봉 등의 대신들이 반대하더라도 태조가 그냥 추진해버리기도 하였다. 이것을 그저 정도전이 권력욕에 함몰되어 그랬다는 식으로 판단하면 매우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고 나라 전체적으로 다방면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 대표격의 인물이 여러 부처를 어우르며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여러모로 간편하다. 이성계는 무력과 권력의 구심점으로 기능하였으나, 나라를 경영하는 것에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정도전은 여러 직위에 임명되고, 해임되기를 반복하며 개혁을 추진하였다. 다만 그 과정에서 조준과 결별하게 되었으며 여러 마찰을 빚은 것은 명백한 정도전의 크나큰 실책이자 패착이었다.[* 사적으로 그리 친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서만 동지 관계였던 정도전과 조준은 요동 정벌 문제를 두고 그 관계가 완전히 파탄나 버렸다. 정도전 본인 뿐 아니라 남은 역시도 조준을 대놓고 씹을 정도로 갈등을 겪었는데, 조준이 좌정승으로서 조정에서 정도전과 동급 내지 정도전 이상 가는 입지와 실력을 지닌(당시 조정의 영수는 정도전이 아니라 조준이었다.) 인물이었음을 생각하면 조준과 갈라선 것은 정도전의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다.] 굽힐 줄 모르고, 사람을 다스릴 줄 모르며, 주변 관리에 서툰 특성은 꾸준하다. 인간됨이라고 한다면 이런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정도전은 집권 기간 동안 과격한 행보를 보였다. 모든 대신들을 총괄하고 국정을 이끄는 위치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은 필요한 법이다. 바로 그 과격함, 선천적인 타협을 모르는 기질, 이상주의적인 사상이 정도전을 역성혁명과 개혁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적을 만들지 않고 무탈히 정국을 꾸려나가는 것에는 타협할 때는 타협하고, 굽힐 때는 굽히는 능란한 정치가의 모습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이런 그의 기질과 당시 혼란했던 정국은 [[상극]]이었다. 고려는 망했지만 구세력 상당수는 살아남았고,[* 이색, 정몽주 계열 포함.] 개혁정책에 대한 반발은 컸다. 그 상황에서 명나라까지 딴지를 걸어왔다. 더구나 자신을 지지해주던 왕은 노쇠해지고 세자는 어린데 정도전 자신도 나이 60에 가까워져 개혁의 진행에 조바심을 느꼈을 것이다.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반대파는 기세등등해지는 이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낀 정도전이 점점 과격한 행보를 보인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워낙 문([[文]]) 쪽으로만 치우쳤는지 체구는 뚱뚱했다고 한다. 배가 불룩 나왔다고 하는 묘사가 사서에 있을 정도. 이 점은 본인도 "농부에게 답하다"라는 글에서 "뺨이 풍요하고 배가 나왔다"라고 자신의 외모를 묘사했다. 또한 정도전의 후배이자 정치적으로는 반대 입장이었던 권근은 정도전의 용모를 "온후한 빛과 엄중한 용모는 쳐다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 보는 듯하고 다가서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다. 그 얼굴이 윤택하고 등이 펴진 것이 온화함과 순함이 속에 있음을 알겠다"라고 묘사했다. 실록에서도 주원장이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하자 "배 불러오는 병에 걸려서 안됩니다"라고 하고 정도전이 죽을 때 이웃집으로 도망치자 그 집 주인이 '배 불룩한 사람이 저희 집에 숨었습니다'라고 이방원에게 고발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실록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이방원 집권 이후 이미지 왜곡을 위해서 넣었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이로 미뤄 보면 정도전은 꽤 풍채가 좋은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등이 펴졌다"는 권근의 묘사를 보면 보기 싫은 비만형은 아니었던 듯.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에 의하면 하루는 정도전이 이숭인, 권근과 더불어 각자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에서 시를 짓는 것을 평생의 즐거움이라 했고, 권근은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숭인은 이런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후일 유배를 가서 정도전이 보낸 이한테 장살당한다.] 이에 정도전은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한다. 개국 이후 직접 병서를 지어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했다는 점도 그것 정도야 문서로 된 자료가 당연히 많고 부르기만 하면 올 수 있는 무관들은 많으니 관심만 있다면 아무나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이 몸담았던 고려시기에는 문관의 밑에 무관들이 모여 군사적인 실무를 수행했다. 이 작업에는 왕자들도 참가했다. 이성계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수어지교]]였던 듯. 정도전이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이 있다면 태조가 전폭적으로 밀어줬으며, 정도전은 그 보답으로 태조를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왕이 된 후에도 정도전에게 스스로를 '송헌거사'라고 칭하면서 편지를 쓰기도 했었고, 한양 천도 후 연회 자리에서 정도전이 태조의 무공을 찬양하며 지은 '무공곡(武功曲)'과 더불어 태조의 문덕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문덕곡(文德曲)'이 연주되자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이거 니가 지은 노래니까 당장 일어나서 춤 좀 춰봐"라고 명했고 정도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이성계는 웃옷을 벗기고 춤을 추게 하며 흥겹게 놀았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10030_001|#]] 이 일화는 [[용의 눈물]]에도 재현되어 있다. 다만 정도전이 웃옷을 벗지는 않고 곱사춤만 추는 정도로 표현되었다.[[http://www.youtube.com/watch?v=X2SmVWZA2vs|해당 장면]] 또한 이성계가 묏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닐 때 정도전도 이를 수행했는데 정도전은 노년이 되어 [[죽음]]을 준비하는 이성계에게 "오늘날 묏자리를 잡으러 다니시는 것을 보니 슬픔을 금치 못하겠나이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도전의 죽음을 전해들은 이성계는 "나의 원훈을 죽였구나"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방원]]의 정도전 [[숙청]]은 애시당초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 가족은 대부분 해를 입지 않았으며[* 정도전은 역모죄가 아닌 종친모해죄로 잡혀 죽었다. 그래서 후손이 남을 수 있었던 것. 태종 역시 정도전을 그리 쉽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정몽주를 대하던 자기 아버지처럼 우유부단하지는 않았다.] 설사 노비 등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몇 년 후 대부분 복권되었다. 정도전은 삼형제의 [[맏이]]었는데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당시 둘째 정도복은 [[한성판윤]][* [[한성부]]를 관할하는 판윤이라는 말로써 요즘으로 치면 대략 [[서울특별시장]] 겸 서울고등법원장 겸 서울고등검찰청장 겸 서울경찰청장 정도에 해당한다. 다만 생각보다 실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으로 있었다가 정도전이 죽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영주시|영주]]로 낙향했다. 셋째 정도존은 무인정사 당일 정도전과 함께 피살되었다. 정도전에게는 [[경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최습의 딸인 경숙택주 최씨라는 아내와 아들이 4명이 있었고 정진, 정영, 정유, 정담이라고 하지만 아들이 3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둘째, 셋째, 막내아들인 [[정영(조선)|정영]], [[정유(조선)|정유]], [[정담]]도 아버지, 삼촌과 함께 무인정사 때 이방원과 싸우다 전사한다. 살아남은 한 명의 아들은 바로 맏아들인 [[정진]](鄭津, 1361~1427)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화를 면하였다. 이후 전라도 수군(水軍)의 일개 병사로 신분이 강등되어 수병 생활을 9년간 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 수군은 천역에 속했다.] 아내 최씨 역시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이방원은 정진을 판[[나주시|나주]]목사로 임명하는 방법으로 복권시킨건 물론 정도전의 정책 대부분을 그대로 시행했다. 태종이 정책 시행이야 그렇다 쳐도 왜 [[정적]]의 아들인 그를 아무 대가도 없이 복권시켰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적어도 태종은 그를 종친모해죄로 몰았으며 정적으로만 생각했지, 적어도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적으로 몰았더라면 삼족을 멸했을 텐데 그의 후손이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 태종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라 태종의 숙부인 [[의안대군(이화)|이화]]도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단순한 집안 싸움이라고 일축했던 사례가 있었다. 묘하게 태종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도 직접 복권시킨 전례가 있으며 애당초 본인부터가 정적에 관대한 면이 있기도 했고 말이다.[* 태종이 정적에 관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종친들 때문이다. 당시 종친들은 사병 혁파 문제 때문에 정도전과 척을 진 뒤 이방원을 크게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원은 굳이 정적을 죽이지 않고도 적당히만 눌러놓는다면 종친들의 지지라는 뒷배경을 바탕으로 충분히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다. 때문에 태종은 후에도 죽이는 방식의 숙청은 [[외척]]들 중심으로 진행했을 뿐 정치적인 문제의 정적 숙청은 귀양을 보내고 찾지 않거나 낙향하도록 압박하는 식으로 처리했다.] 정도전의 장남 정진에 의하면 정도전은 스스로 시문을 쓰지 않고 입으로 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게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듣고 작성한 원고가 마음에 안 들면 원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진이 <[[삼봉집]]>을 간행할 때 아버지가 직접 저술한 원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정도전의 시문을 모아서 아버지의 문집을 편찬했다고 한다. 정진은 이후 여러 지역의 목민관을 역임하였고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세종(조선)|세종]] 대에 형조판서까지 역임하는 등 높은 지위에 올랐다. 개인적인 인품이나 평가도 좋았으며 그가 졸했을 때 세종이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내리기도 했다. 정진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용인현령을 지낸 정래이고 둘째는 직산현감을 역임한 정속이다. 이 중 정속의 아들이자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조선)|세조]] 시기에는 우의정, [[성종(조선)|성종]] 시기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삼봉집]]》에<[[경제문감]]>·<[[조선경국전]]>·<[[불씨잡변]]> 등을 추가하여 1464년 목판본으로 중간했으며 이 때 정도전이 찬정한 책을 성종과 [[세자]]에게 바치기도 했다. 정문형은 [[연산군]] 때 또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대간#s-5]]이 벌떼같이 항의해서 결국 파직됐다. 그러나 이건 정문형 개인이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대간에 의한 새 임금 길들이기 성격이 더 강했다. 연산군도 이에 불만을 가져서 대간들의 공격에 쩔쩔매는 대신들에게 "지금 의논하는걸 보니 정문형이 어떤지는 말도 하지 않고 대간들의 말만 나오고 있다. 내 말은 우습게 여기고 대간들은 두려운건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연산군일기 13권, 연산 2년 3월 29일 정미 3번째기사] 대간들이 정문형을 반대할 때도 '역적 정도전의 후손이라서 안된다'라는 식의 [[논리]]는 꺼내지 않았으며 "벼슬살이 오래 하는 동안 딱히 칭찬할만한 일이 없습니다"라며 매우 궁색한 논리를 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이미 정문형의 할아버지인 정진을 왕명으로 복권시켰고 고위 [[관료]]까지 역임시켰는데 이제 와서 정도전을 들먹이며 정문형의 벼슬 제수를 막을 수는 없다. 자칫하면 정도전 [[가문]]을 복권시키고 후손들을 우대한 선왕들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연산군에게 딴지를 걸고 싶던 대간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 이를 보면 정도전 개인은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역적이 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이 멸족하지 않고 오히려 [[사대부]]로서 영달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그 후로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가문을 이어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냈으며 오늘날까지도 봉화 정씨는 계속 맥을 이어오고 있다.[* [[나꼼수]]로 유명한 전 국회의원 [[정봉주]]가 대표적인 정도전의 후손이다.] 벼슬살이 오래 하는 동안 딱히 칭찬할만한 일이 없었다는 대간들의 말답게 정문형은 자기 증조부와는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증조부는 백성을 위한 개혁안과 여러 정책을 내놓았으나 정문형은 세조 시대의 [[청백리]]라는 것을 빼면 백성을 위한 개혁안을 내놓지도 않았고 업적 같은 것도 전혀 없어 남긴 것이 없었다. 증조부는 [[정통성]]이 부족한 세자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을 배신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정안대군에게 죽음을 맞이했으나 정문형은 정통성 만렙의 왕 [[단종(조선)|단종]]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세조(조선)|수양대군]]에게 붙어 [[훈구파]]가 되어 승승장구하며 잘먹고 잘살았다. 그런데 정도전의 친구이자 [[라이벌]]이며 조선을 세우는데 반대하고 이방원에게 죽임당한 정몽주의 손자 정보는 자기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 이방원의 적통 단종을 죽는 날까지 배신하지 않았다.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인 [[사육신]]을 옹호하다가 세조의 분노를 사서 끌려가는 정보를 보며 그 옛날 이방석을 지키려고 했던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도전의 후손들은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의 후손들을 섬기며 잘 살았으나 정작 정도전 본인은 조선이 끝나기 직전까지 신원되지 못했다. 이미 그와 같이 죽었던 [[남은]]은 세종 때 일치감치 복권되었고 [[심효생]]도 숙종 때 의안대군이 추숭되면서 복권하게 되었건만 정도전만은 여러 번 복권 논의가 되었어도 신원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국가의 공식 입장이었던거고 민간에서는 의견이 갈렸는데 '선유(先儒)'로 존경하는 사대부들도 나타나는 등 15세기 중반부터 이미 역사적으로는 어느 정도 복권이 된 상태였고 정도전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삼봉집>의 간행도 딱히 금지되지 않았다. 태종 즉위 이후 공신들부터가 이미 태종의 지나친 정도전 죽이기[* 직접 문제시된 부분은 [[이숭인]] 등을 장살한 혐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태종 면전에서 표한 바 있는데 그 공신들은 태종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주역들인 [[조영무]], 조온[* 조인벽의 아들로, 조선 건국의 [[공신#s-1.2.1|개국공신]]이자 [[1차 왕자의 난]]의 [[공신#s-1.2.2|정사공신]]이다. [[계모]]가 이성계의 동복누나인 [[정화공주]]다.] 같은 이들이다. 공신들은 태종에게 "정도전, 남은이 [[이숭인]] 등을 죽인 것은 비록 임금을 속인 행위이나 어디까지나 사직을 위한 것이었다"고 항변하였다. 조영무는 대놓고 "정도전이 잘했다는건 아니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용서할만 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태종도 정도전을 죽인 직후에는 함부로 정도전을 폄하하지 못했고 오히려 양정(兩鄭)이라고 해서 정몽주와 동급으로 두었다. 본격적으로 정도전의 명예를 폄하하던 것은 그 이후인데 공신으로서의 화상과 녹권 등 박탈, 이숭인 등을 장살한 건을 이용했다. 문집의 서문을 써 주는 것 자체가 후학으로서 문집을 저술한 이를 존경하는 뜻을 표하는 행동인데 처음 <삼봉집>을 교정하고 서문을 쓴 이는 다름아닌 정도전의 정적이었던 [[권근]]이다.[* 권근은 조준과 함께 태종에게 정도전의 장남 정진의 복권도 건의했다. 이를 보면 정치적으로는 대립했을지언정 원수진 정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권근은 <불씨잡변>을 비롯해 정도전의 저작 상당수의 서문을 쓴 사람으로 [[이숭인]]과 정도전의 벗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문집 <삼봉집>을 재편찬하고 서문을 쓴 이는 세조 때의 [[재상]]이자 권력자 중 1명이었던 [[신숙주]]였다. 신숙주가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과 친했기 때문에 정문형이 <삼봉집>을 중간할 때 도움을 주면서 서문을 쓴 것. 신숙주는 <삼봉집>에서 "당시 영웅호걸이 난립했지만 선생만한 인물은 없었다"고 그를 높이 평가했고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도 정도전을 최고의 선비로 평가했다. [[광해군]] 때의 [[허균]]의 경우 정도전을 현인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내용이 들어간 탄핵하는 상소를 받았다. 이 때 정도전이 지은 시를 동인시문에 가장 앞에 놓았다고 하는 내용도 상소에 포함되었는데 허균은 그저 국초의 인물이어서 시집에 넣었다고 변명하였다. 이를 미루어 보아서 허균이 정도전을 좋게 평가했거나 시집에 넣을만한 시를 썼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조선 후기의 [[영조]]와 [[정조(조선)|정조]]도 정도전을 높이 평가했다. 공식적으로 [[역적]]으로 단죄된 인물이었다면 문집이 편찬되는 것은 물론 조정의 중신들이 대놓고 서문을 써주거나 문집이 출간되는 등의 행동은 상상하기 힘들다. 정도전의 위치는 완전한 역적도 아니지만 공식적으로는 상당히 폄하되고 있는 미묘한 상태였다는 얘기. 그러나 정도전은 유학 국가의 시스템을 건설한 사람이면서도 고려 왕조를 쓰러뜨림으로써 유학의 제일 원칙인 충성을 저버린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평가 면에서도 조선 초기의 많은 [[흑역사]]들을 모조리 뒤집어쓰고 말았고 그 행적에 대해서도 많은 사대부들이 정도전은 주군을 배신하고 나라를 멸망시킨 간적이라는 이중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특히 [[송시열]]을 비롯한 사림파는 정도전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반면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성리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충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행적과 무관하게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은 정몽주가 태종 때 복권되고 [[중종(조선)|중종]] 때 문묘에 배향된 것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정도전은 성리학 이상 국가를 창조해내었으나 도리어 그 행동으로 인해 결국 그 국가에서 버림받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평가의 다른 해석으로 태종을 비롯한 조선 왕실은 정도전을 폄하하더라도 일종의 '한계선'을 지켰다는 해석도 있다. 어찌되었든 정도전은 조선을 세우는데 공이 큰 1등 공신이고 조선 왕조의 시조인 태조와 모든 일을 함께 해왔다. 여기서 한계선을 잘못 넘으면 태조의 정통성 및 조선 건국의 당위성마저 훼손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도전을 잘못 옹호했다가는 반대로 정도전을 척살한 태종의 정통성이 깨지게 된다. 그래서 정도전만을 폄하하고 후손이나 일부 공적은 인정해주는 등 다소 어정쩡한 평가를 내린 게 그 결과라는 의미다. 정도전을 굳이 '역모죄'로 끝까지 몰지 않고 '종친모해죄'로 꼽은 점도 이와 연관된다. 복권 움직임은 정조 말년부터 <삼봉집>을 다시 간행하면서 나타났지만 정도전이 공식적으로 복권되고 명예를 회복한 것은 [[흥선대원군]] 섭정기에야 이루어졌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정도전을 사면하면서 [[시호]]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후손들을 예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