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 (문단 편집) == 기타 == * 《[[정감록]]》의 저자로 지목된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정감록》은 영&정조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지만, 정도전이 [[경복궁]]의 위치를 잡는 등의 일로 인해 민중들에게는 풍수도참에 능통한 인물로 알려졌고 조선 왕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패배자였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들이 종합적으로 엮여서 그를 정감록의 저자로 내세우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긴 하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상이 철저한 성리학 국가 건설이었으며, 한양 천도 때 [[하륜]]과 대립했을 때 한 말인 술수하는 자들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봐도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록에서 실제로도 정도전 본인이 직접 "신은 술수 따위는 배우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단지 그런 거 치고는 또 본인 산문집인 금남잡제에 실려있는 사이매문이란 글을 보면 민초들이 믿던 [[도깨비|이매]] 같은 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도 했던 듯 하다. 글 제목 자체가 이매에게 보내는 사과문이란 뜻이기도 하고. 이 글은 주변에 도깨비가 모여들어 정신이 사납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도깨비가 유배 간 곳의 민초들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쓰였다는 말이 더 많기 때문에 이 경우엔 그냥 비유적인 용도로 가져다 쓴 쪽에 가까울 것이다.[* 최영을 번개의 신 토르에 비유한 사람이 정말로 토르가 있다고 믿지는 않듯이.] 원문은 [[http://jbc304.egloos.com/viewer/4968189|여기에서 확인 가능]]. * 조선 건국 후 한양의 주요 건물의 위치를 설계하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경복궁의 경우 정도전은 북악산 남쪽을, 무학대사는 북악산 서쪽을 주장했는데, 무학대사는 북악산 남쪽에 경복궁을 지으면 정룡(장자)이 쇠하고 방룡(장자 이외의 아들)이 흥하기 때문에 정도전과 대치했다고 한다. 정도전이 경복궁을 북악산 남쪽으로 한 이유는 태조의 막내 방석(방룡에 해당)을 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다. 단 야사는 어디까지나 야사다. 정도전은 풍수지리를 '음양, 술수의 학'으로 배격했던 철저한 성리학자였음을 기억하자. * [[경복궁]] 동십자각 너머에 거주하였는데 이는 주한 미대사관 뒤이고 오늘의 종로구청 자리이다. 그래서 종로구청 민원실 앞에 정도전 집터임을 알려주는 작은 표석이 세워져 있고, 종로구청 주변 도로 이름도 정도전의 호에서 따온 '삼봉로'. * 후배인 [[권근]]은 "선생은 진실로 동방의 [[맹자]]"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정도전과 [[맹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본인은 아첨인 줄 알면서도 꽤 흐뭇해 했을 듯. * 남한강의 명승지인 [[도담삼봉]]과 연관된 설화가 있다. 설화에 의하면 도담삼봉은 정선에 있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온 거라 정선군에 세금을 내라 했는데, 소년이었던 정도전이 도담삼봉을 우리가 갖고 싶어서 갖고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물길이 막혀 피해를 보니 정선군에서 도로 가지고 가라고 말하여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정도전이 40살 가량 많다.] [[대월]] 레 왕조의 개국공신인 [[응우옌 짜이]]도 정도전과 아주 유사한 인생을 살다 갔다. * [[소련]]에는 정도전과 매우 흡사한 인생 역정을 걸었던 인물로 [[레프 트로츠키]]가 있었다. 건국자([[태조(조선)|이성계]], [[블라디미르 레닌|레닌]])를 도운 2인자, 건국자의 후계자([[태종(조선)|이방원]],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에 의해 [[숙청]]됐다는 점 등 공통점이 많다.[* "다만 정도전이 구상한 조선의 체제는 일부 현실적인 수정만 있었을 뿐 태종과 세종에 의해 완성이 된 반면, 트로츠키가 주장한 트로츠키주의는 철저하게 배격되고 결국 범슬라브주의의 부활이라는 방식으로 흑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실상은 중공업 우선주의를 비롯한 트로츠키의 구상 대부분도 스탈린에 의해 실현되었다는 해석이 주류이다. 당장 소련 체제를 풍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소설)|동물농장]]에서도 스노볼이 구상한 풍차 건설 계획을 나폴레옹이 채택하는 모습을 묘사한바 있고, 트로츠키가 원했던 혁명의 수출 역시 2차대전 후 동구권의 성립이라는 다른 과정을 거쳐서나마 이루어졌던 것. 더 나아가 20세기 후반 이후의 수정주의적 관점에서는 아예 트로츠키의 구상(영구혁명론)과 스탈린의 구상(일국사회주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지적까지 제기될 정도이다. 이 점에서는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 집권 이후 소련에서 철저히 배격된 것은 트로츠키의 구상이 아니라 트로츠키의 '''이름'''이다. 중공업화를 비롯한 트로츠키의 구상이 스탈린을 통해 약간 수정된 과정을 거쳐서나마 실현된 것과는 별개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이름 자체는 소련 및 동구권 내에서 (이념적 지향을 따지기 이전에) '주류 노선에 따르지 않는 종파주의자'를 매도하는 일종의 '''욕설'''로 완전히 자리잡을 정도로 철저히 금기시되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를 찾아본다면 조선 왕조 대부분의 기간동안 공식적으로 복권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역적으로 낙인찍혀 금기시된것도 아니고, 그 공적에 대한 인정도 어느정도 받았던 '애매한' 입장에 있던 정도전과 그렇지 못했던 트로츠키의 차이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정도전과 트로츠키를 비교한다면 또 흥미로운 점이, 정도전의 공식적인 복권과 명예회복이 결국 조선 말기(멸망 직전)인 흥선대원군 섭정기에 이루어진것과 비슷하게 소련 초기 스탈린 집권과정에서 숙청당한 고참 볼셰비키 혁명가들의 공식적인 복권도 소련 말기(멸망 직전)인 1988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만, 이 때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등의 다른 고참 볼셰비키들은 모두 복권되었지만 '''트로츠키만은 복권되지 못했다'''.말하자면 멸망 직전의 흔들거리는 국가에서 분위기 쇄신을 위한 일종의 '역사 정리 작업'을 하여 건국 초기의 빚을 갚으려 했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정도전의 경우 아무리 큰 꿈과 야망을 가졌어도 왕조국가 조선에서 왕의 권위 자체, 그리고 이씨 왕조의 왕통에 도전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던데 비해 트로츠키의 경우 스탈린과 최고지도자 지위를 두고 다퉜던 것은 둘째치더라도 서기장을 사실상의 최고지도자로 하는 소련의 권력 전통이 가지는 정통성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는 복권될 수 없었던 점을 차이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2017년 4월 25일 [[JTBC]] 대선토론 2부 모두에서, [[정의당]] 대선후보 [[심상정]]에 의해 "개혁적 리더십의 표상"이라는 찬사와 함께 가장 닮고 싶은 역사인물로 언급되기도 했다. *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이 정도전을 존경했다 한다. 제자 기준격의 상소에 의하면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東人詩文)》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912024_006|#]] * 정도전에 대한 연구도 이어지고 있는데, [[이상백]]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1935년 '삼봉인물고(三奉人物考)'라는 최초의 정도전 연구로 조선에서 평가절하되던 정도전을 재평가했으며, 이를 이어받은 이상백의 제자 서울대 국사학과 한영우 명예교수 역시 '정도전 사상의 연구'라는 학위 논문 등 여러 저술들을 통해 오늘날 정도전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