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 (문단 편집) === 토지 개혁 === 정도전은 고려말 전제개혁이 한일이 없다고 본인이 의사를 표출했으나, 조선 건국후 지은 조선경국전에는 당시의 상황을 적고 비판하였다. >"전제(田制·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족(한국사)|호강자]](豪強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진 반면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토지개혁]] 문제에서 정도전의 주장은 민본적이었는데, >"[[정전제|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국가가 토지를 몰수하여 공전(公田)으로 만든 다음, 경작을 담당하는 백성들 개인에게 나누어주는 계구수전(計口授田) 또는 계민수전(計民授田) 방식을 추구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던 [[이색(고려)|이색]] 등의 고려파 사대부와 왕실 인척, 귀족 등 권세가들의 방해와 반대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전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준(조선)|조준]]이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과전법]]을 제시하였고, 이성계 일파는 조준을 지지하였다.[* 이마저도 [[창왕]] 폐위 전까지는 구세력들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창왕이 폐위된 이후 간신히 통과되었다. [[정몽주]]는 창왕 재위 당시에 과전법이 제시되었을 때, 어느 한 쪽을 지지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결국 창왕을 폐위시키는데 동참하고, 결국 과전법이 통과된 것을 보면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생각했던 무상으로 백성들에게 토지를 균등•분배하는 계민수전(計民授田)과는 달리 조준의 과전법(科田法)은 모든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주는 것이 아닌 전직 및 현직 [[관료]]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후퇴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부전(賦典)》에 그 실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전하([[이성계]])께서는 잠저(潛邸·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집)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 혁파를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구가(舊家) 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前朝·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배나 낫지 않겠는가?" >---- >부전(賦典)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과전법]]'에 대해서 문제는 있으나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개혁이었다고 자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