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 (문단 편집) == 개요 == >'''"백성(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백성이 인군을 버리고 따르는 데에 있어서는 털끝만 한 여지도 용납되지 않는다."'''[* 출처 맹자 "[[맹자|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民)은 복종하지만 백성(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 >'''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하민지약야 불가이력겁지야 지우야 불가이지기지야) >'''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去就之間 不容毫髮焉''' >(득기심즉복지 부득기심즉거지 거취지간 불용호발언) >---- >《[[조선경국전]]》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 >《[[삼봉집]]》 [[여말선초|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유학자]], [[사상가]], [[혁명가]].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를 도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적 사상에 입각한 [[조선]] 건국 작업을 이끈 [[공신]] 중 한명이었다.[*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고제(전한)|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다만 졸기에는 이어서 "그렇지만 임금이 그의 청을 다 들어주지는 않았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이방원은 "조선 개국의 공은 모두 [[조준(조선)|조준]]과 [[남은]]에게 있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정도전을 깎아내렸다. 아무튼 정도전의 저 발언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오만방자한 발언'''으로 보일 여지가 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인이 조선을 위해 공을 세웠다지만 그래봤자 한낱 신하에 불과한데다, 정도전 자신을 고용하고 이끌어 준건 바로 다름아닌 주군인 [[이성계]]다. 실제 아무런 힘도, 기반도 없는 정도전은 자신의 주군인 이성계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성계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을 좋아해서 이성계 앞에서는 신하들이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신이 나서 의견을 말했다고 하는데 그런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방원은 달랐다고 한다. 또 조선 건국 과정에서 정도전 뿐만 아니라 조준과 남은, 특히 조준의 역할과 공은 컸다. 실제로 개국공신 서열에서도 조준이 정도전보다 앞서며, 관직도 조준이 높았다. 하지만 조선 개국 이후 이성계의 개인적 신임을 얻은 정도전이 권력을 잡게 되었고, 현대에 와서 정도전이 지나치게 부각되면서 조준 등 다른 공신들의 역할이 과소평가된다는 지적이 있다.] 조선에서 그의 직위는 종1품 판삼사사에 머물렀으나 그를 신임한 강력한 뒷배인 이성계의 지지하에 권력을 지닌 [[총신(역사)|총신]]이었다. 그러나 [[표전문제|표전문 사건]]으로 [[홍무제|명나라 주원장]]의 노여움을 사 [[조선]]과 [[명나라|명]] 양국간의 외교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사병]] 혁파를 시행하였고, 이후 [[제3차 요동정벌|요동정벌]]을 추진했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종(조선)|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대표 저서로는 《[[불씨잡변]]》이 있으며, 이를 통해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다만 불심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가 불교를 숭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군말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불교 자체보다도 당시 고려 사회를 타락시킨 부패한 불교 세력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