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남규(범죄자) (문단 편집) == 생애 == [[파일:444.jpg|width=400]] [[초등학교]] 졸업사진으로 추정. [[파일:1606988554051.jpg|width=400]] [[중학교]] 졸업사진 [[1969년]] [[4월 17일]]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가정의 3남 4녀 중 장남(위로 누나 넷)으로 태어났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남원시|남원]]에서 자취하며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온 가족이 [[인천광역시]]로 이사하게 되자 [[제일고등학교(인천)|영진상업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그의 학창 시절 성적은 중하위권에 머물렀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4개월간 음료 공장에 다니기도 하였으나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고 방앗간에서 배달일을 하거나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군입대를 하였으며 [[대한민국 육군|육군]] 하사로 만기 제대([[1992년]])하였다. 이후 별 다른 직업 없이 생활하였으며, [[절도죄|절도]] 등 범죄 행위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 정남규는 어린 시절 아버지([[1999년]] 사망)의 끊이지 않는 [[폭행]]과 자신을 아껴주던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추행]]과 [[성폭행]][* 정남규는 자신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 중 첫 번째로 이 일을 꼽았다. 당시 미제사건이었던 [[부천시|부천]] 남아 두 명 성폭력 살인 사건에도 참여하고 있던 [[권일용]] 프로파일러가 해당 사건의 범행 방식과 정남규가 말한 [[강간]] 피해 방식의 유사성을 유추해내어 추궁 조사한 끝에 부천 남아 살인 사건이 해결되었다.], [[성희롱]]을 당한 일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동급생이나 선배들에게 [[집단괴롭힘]]과 [[학교폭력]]을 겪었고 후배들에게 무시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자취방 옆에 살던 아저씨에게 두 번이나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군대 복무 시절에도 선임들에게 [[가혹행위]]와 심한 구타를 겪었고, 한 선임에겐 또 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후임들에게는 [[기수열외]]를 당하는 등 군 전역 후 [[사회생활]]을 힘들어하며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1989년]] [[4월]], [[특수강도]]죄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1994년]] [[절도죄]]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및 벌금 20만 원 등의 선고를 받은 후 [[1996년]] [[성폭력범죄처벌법|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징역 2년 6월, [[1999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절도, [[강간]] 등) 징역 2년, [[2002년]] 절도죄로 징역 10월 등 총 3년 4개월간 [[교도소]]에 수용된 경험이 있었다. 검거 당시까지 어머니, 친누나와 [[인천]] [[부평구]]의 한 주택에서 3명이 함께 살았지만, 가족 중 직장을 가진 이가 없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머니 명의의 낡은 [[주택]]에 딸린 방을 세놓고 받는 [[월세]] 55만 원이 정남규가 절도 및 강도로 충당한 돈을 제외하면 수입의 전부였다. 요약하자면 [[가난]], [[아동 학대]],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가혹행위]], [[집단따돌림]] 등 끔찍한 폭력들을 전부 다 겪은 굉장히 암울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가해자가 된 피해자|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안타까운 사례이지만, '''이러한 과거가 그의 [[연쇄살인|죄]]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쾌락살인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