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교회 (문단 편집) ==== 성상 논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성상 파괴주의)] || [[파일:external/www.artlex.com/Iconoclst_byz.manscrpt.lg.jpg|width=100%]] || ||성상 논쟁 시기에 동로마 제국에서 제작된 성경시편 사본의 삽화. 성상파괴주의자들이 교회에서 물에 적신 해면으로 [[예수]]의 성상(벽화)을 지우는 것을,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장대에 꽂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 예수에게 갖다 댄 것[* [[루카 복음서]] 23, 36 참조.]에 대비시키고 있다.|| 성상 논쟁에 관해, 과거에는 가톨릭 교회적 관점[* 더 정확히는 서유럽에서 뒤늦게 성상 논쟁이 발생한 종교개혁적 관점.]의 영향으로, 서유럽 중심적 역사 서술에 따라 성상 논쟁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의 논쟁이라는 관점의 역사 서술이 횡행했으나, 실제에 있어서 성상 논쟁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대립이기 이전에, 동방 교회 내부의 대규모 이단 내지는 이교의 발흥이었다. 서방 교회와의 논쟁은 그 와중에 있었던 곁가지에 가깝다. 성상 파괴파는 사실 동방 교회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비주류의 분파였으나, 이것이 동로마 제국 황제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동로마판 [[문화대혁명]]과 같이 되었을 뿐이며, 동서방 교회가 성상 공경과 성상 파괴로 입장이 나뉘어 대립한 것도 이렇게 동방 교회가 성상 파괴파 황제의 영향 아래 있었던 일시적인 기간뿐이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이것이 동서 대분열로 직결된 바도 없다. 단지 서방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잘 써오던 성상을 놓고 갑자기 동방 교회(의 일부)가 괜한 시비를 건 것이며, 이 때문에 서방 교회가 동방과 사이가 멀어진 원인 중 하나이긴 하다. 그러나 동로마 외에 프랑크 제국의 [[루트비히 2세|루트비히 경건왕]][* 왕이라고 번역하나 엄연히 황제에 올랐다.]의 장자 로타르도 교황에게 검토해보라 했었다.[* 출처는 'P.G.맥스웰-스튜어트, 박기영 옮김, "교황의 역사", 서울, 2005, 갑인공방'.] 그때 교황이 내세운 근거가 서민에 대한 교육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자신들과 접촉하는 [[그리스도교]]를, 특히 성상 공경과 관련하여 우상 숭배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성상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싹텄다. 이후 8세기에 권력을 잡은 소아시아 출신의 [[레온 3세]]가 성상을 거부하면서 성상 파괴주의가 시작되었고, 그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신학적인 사유를 동원하여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성상 공경을 열심히 까댔으나, 동방 교회 주류에선 이런 과격한 주장에 거부감이 강했다. 이러한 성상 파괴주의 황제들은 성상 파괴에 저항하는 기존의 총대주교들을 쫓아내고, 성상 파괴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후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성상 파괴파와 정통파 간의 투쟁이 일어나 정통파는 무수한 박해를 받으며 동시에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성상파괴주의는 내적으로는 유럽 및 소아시아 해안지대 속주들과 대립하는 소아시아 내륙 속주 간의 알력, 동로마 제국의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내부 투쟁이 얽혀들어 전개되었다. 이는 결국 한세기 반에 걸친 내전으로 치달았으며, 대외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 및 동로마 황제와 알력관계에 있던 교황의 세력까지도 논쟁에 합세하였다. 이 논쟁은 서기 787년 [[레온 4세]]의 부인으로서 ~~아들 눈알 뽑고~~ 여황제가 된 [[이리니]]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파괴파를 이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레온 5세가 성상 파괴주의를 부흥시켜 제2차 성상파괴가 일어났으나, 서기 843년 섭정 황후 테오도라에 의해 논쟁이 종식되고 성상이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성상 파괴파에 대한 양보로 정교권에서는 되도록이면 성상 중 [[이콘]]만을 사용하도록 권고하였고,[* 이콘 이외의 성상을 금지한 것은 아니지만 가톨릭에 비교하면 잘 사용되지 않는 편이다.] 정교권에서는 이날을 '정교주일'이라는 축일[* 사순 제1주일로, 성상 논쟁에서 정통 교리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콘를 들고 행렬을 한다.]로 기념하였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성유물과 이콘 화가들이 박해를 피해 동로마 제국을 떠나 서유럽으로 옮겨왔으며, 이들은 중세 초기 서유럽 종교 미술의 수준을 제고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