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교회 (문단 편집) ==== [[고의식파]](古儀式派) 분열 ==== 17세기 중엽에는 니콘 대주교가 [[러시아 정교회]]의 지나친 현지화와 '변형'을 개혁하려고 했다. 성경을 재번역해 오류를 수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처럼 성호를 그을 때 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으로 긋는 방식을 도입했다. 그리고 [[교회 슬라브어]]로 진행하는 예배를 당대 [[러시아어]]로 진행하도록 바꾸고 여러 분야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일치를 추구했다. 1654년의 교회 회의에 모인 주교들은 니콘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으나,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와 교회 예식을 [[동로마 제국|그리스]]와 러시아의 전통에 일치시킬 것을 제안했다. 니콘의 개혁은 니콘 개인의 지나친 야심과 [[차르]]와의 불화로 인해 좌초되는 듯 보였으나, 니콘은 내쳤어도 그의 개혁은 존중한 차르와 개혁 찬성파의 지지 덕분에 지속될 수 있었다. [[파일:BoyarinaMorozova.jpg|width=100%]] [[고의식파]]를 추종한 이유로 체포되는 [[귀족]] [[여성]]을 그린 그림 《대 귀족부인 모로조바》[*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 그림.][* 그림에서 체포되는 귀족 여성이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고 [[십자가]]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들이 세 손가락 대신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행위 자체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았음을 뜻한다. 또 주변 배경 인물들을 자세히 보면 실로 다양한 군상의 모습이 묘사되었는데, 좌측에서 끌려가는 귀족부인을 비웃는 남자들의 모습, 그저 오랜만의 볼거리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는 여인들, 우측 편에는 눈시울을 훔치거나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는 여인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맨 오른쪽 아래에는 한 거지 남자가 두 손가락을 치켜들고 부인을 축복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 정교회 특유의 영성에서 발달한 개념인 '유로지비(바보 성자)'를 묘사한 것이다. 모로조바 부인은 '고의식파'의 수장인 아바쿰 대주교와 교류하며 그를 지원하였기에 차르의 분노를 사서 체포되었고 보로프스키 수도원에 유폐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니콘의 개혁에 반발한 세력도 적지 않았다. 소위 '구교도'(舊敎徒)[* 일반적으로 구교도라고 하면 서구에서는 [[가톨릭]] 신자를 의미하지만, 러시아 문헌이나 문학에서 묘사되는 구교도는 정교회 전통의식파를 일컫는 표현이다.]라 불리는 반대파들은 니콘의 개혁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이 무너진다고 판단하여 개혁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차르와 개혁파들은 이들을 모두 파문하고 화형하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계속 지켜나갔다. 정부도 완전히 구교도들을 '개종'시키거나 없애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갖가지 차별을 가하는 방식으로 전환했으나, 구교도들은 반란을 일으켜 저항하거나 정부의 통치력이 약한 지방으로 이주하는 식으로 대응하여 생존했다. 그리고 구교도들의 이주로 인해 지방의 농민들과 카자키들 사이에서 구교도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져서 이들을 뿌리 뽑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도리어 인구의 상당수가 구교도가 되어버렸다. 서방 교회가 구교(舊敎)와 신교(新敎)로 갈린 것처럼 러시아 정교회도 니콘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전통의식파(구교도)'와 개혁파(니콘파)'로 나뉘어 버린 것이다. 다만, 고의식파들은 정부와 개혁파의 탄압과 세력 이주, 교회의 분산으로 인해 일체된 조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분파로 쪼개졌으며 이 과정에서 이단 종파들이 양산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전통의식파의 한 갈래인 '흘리스트파'에서[* 금욕주의를 강조하고 사제의 존재, 성경, 성인 공경을 부정한 종파로서 사도전승과 성경을 인정하는 종파들 입장에선 흘리스트파도 이단이었다. 재밌는 점은 [[그리고리 라스푸틴]]도 흘리스트파의 영향을 받았다.] 나온 극단주의 종파인 '[[거세파]]'인데 이들은 생식기와 유방(여성의 경우)을 원죄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으로서 19세기 초에 제정 러시아 정부에게 발각당했다. 발각당하자마자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마니교]]' 이단, '[[보고밀파]]' 이단으로 간주받고 크게 탄압받았다. 18세기의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제국|국가]]에 완전히 종속당하기 시작했다. 1700년, 모스크바 총대주교 아드리안이 선종하자 표트르 대제는 대북방 전쟁 발발을 이유로 총대주교 선출을 금지하고 자신이 총대주교를 직접 임명했으며 대북방 전쟁에서 승전한 이후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폐지하고 러시아 정교회 조직을 차르가 통제하는 종무원(宗務院)으로 대체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는 차르에게 완전하게 종속당했고 독립성을 상실했다. 19세기 중반부터 교회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는데, 1833년 [[그리스 교회]]가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1860년 [[불가리아 정교회]], 1879년 [[세르비아 정교회]], 1885년 [[루마니아 정교회]]가 독립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국가별 독립 정교회의 형성은 20세기로 이어져 1917년 [[조지아 정교회]], 1922년 알바니아 정교회가 독립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독립교회의 형성은 근세의 [[민족주의]] 바람과 연관되어 있다. 오스만 치하에서는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이 다소 희미했으며 정교회인을 묶어서 생각했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이 발흥한 후 정교회권 각국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후 정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 국가를 세웠다. 근대 들어서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빠지고 정교회권 각국이 독립하면서 다시금 가톨릭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대표적으로 가톨릭이 [[동방 가톨릭 교회]]라는 이름으로 해당 지역의 교회를 일치라는 명목하에 받아들이면서 현지의 교회가 분열된 문제 등이 있다. 신학적으로도 가톨릭에서 독자적으로 [[교황무류성]], [[성모무염시태|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등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정교회와의 간극이 커졌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가톨릭은 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보수적이었고 [[교회 일치]]에 대해서도 가톨릭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교황]] [[비오 9세]]와 정교회 4대 총대주교 및 주교단 명의로 주고받은 서신에서 가톨릭과 정교회의 갈등과 충돌을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