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정교회 (문단 편집) === 근세·근대 === 15세기 초반에는 [[동로마 제국]]의 [[바실레프스|황제]]들이 멸망 직전의 국가를 구하기 위해 [[교황]]에 굴복하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피렌체 공의회 이후로 교황의 수위권을 따를 것을 선언하였으나, 전체 정교회 세계에서 극심한 반발이 있었고 이를 인정하는 국가는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한 동로마 제국뿐이었다. 하지만 동방교회 내에서도 반발이 대단해서 황제 따라간 통합 찬성파 일부는 ~~돌아가면 맞아죽을까봐~~ [[이탈리아]]에 눌러앉았다. 이들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촉진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컨대 그리스 출신의 베사리온 [[추기경]]이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에 기증한 장서가 [[교황청]]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의 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동로마]]의 [[망국의 군주|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외교적 목적으로 다시 교회 통합을 선언했지만 교회 통합은 말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제국을 친통합파와 반통합파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죽하면 1453년 당시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옌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Γεννάδιος Σχολάριος)가, '[[정교회|참된 신앙]]을 버리고 [[동로마 제국|제국]]을 존속시키느니, 차라리 신앙을 지키고 제국의 운명은 [[야훼|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낫다'라는 식의 발언을 했을 정도. 참고로 이 인물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된다. ~~제국은 망했지만 어쨌든 신앙은 지켜냈다 ~~]. 거기에 [[동유럽]]의 정교권이 반발하여 정교 측에서도 각 교회 간 연결이 크게 약해지게 되었다. 어쨌든 결국 당시의 총대주교는 사임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메흐메트 2세]]의 지원하에 새로 즉위한 총대주교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가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자국 내 교구들이 [[교황]]의 영향을 받으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도 하거니와 막 형성된 제국의 틀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정교회의 도움이 필요했고, 정교회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 시대 내내 정교회는 그간 전란으로 무너진 성당, 수도원에 대한 재건을 지원받았고, [[셀림 1세]]로부터 '''"천재지변으로 인해 무너진 성당, 수도원이라도 반드시 복구되어야 하며, 파괴행위를 엄격히 금한다."'''라는 칙령을 받아냈으며 이는 이후 [[내셔널리즘]]의 시대에 들어 각 민족들이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어 독립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오스만의 통치하에 [[그리스]]와 [[발칸 반도]]에서는 [[밀레트 제도|제한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제3의 로마'를 자처하였으며, 1589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동의를 받아 [[루스 차르국]]에서 [[러시아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설립되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설립된 이후부터 [[러시아 정교회]]의 독립성과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의 압제를 받아 자유롭지 못한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해 정교회의 수장으로 군림하려 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가톨릭|서방]]과 타협한 과거가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순수성을 잃었고 동로마 제국의 멸망 역시 그러한 순수성 상실과 '타락' 때문에 멸망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으며[* 러시아 정교회는 바젤과 피렌체 공의회를 비롯한 여러 공의회에서 [[바실레프스|동로마 황제]]가 [[가톨릭|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통해 제국의 생존을 보장받으려한 시도를 당대에도 격렬하게 비난했다. 문제는 피렌체 공의회 당시 [[키이우]]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 이시도루스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와 같이 해당 공의회에 참석해 공의회의 사항들을 함께 결의했다는 것. 이후 피렌체에서 돌아온 이시도루스는 군주 바실리 2세 대공에 의해 파면되어 감옥에 갇히고(...) 후일 탈옥해 로마로 도망쳐 [[추기경]]이 되었다.] 투르크 파디샤의 통제하에 놓인 콘스탄티노플의 어려운 상황을 논하며 자유로운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17세기에는 당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키릴로스 1세가 [[칼뱅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의 교리를 변개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위한 야시 시노드, 예루살렘 시노드에서 정교회 정통 신앙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17세기의 러시아 정교회는 [[혼란 시대|동란기]] 동안 누구를 차르로 인정하냐는 문제 때문에 세속과 함께 내전을 겪었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으로 수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약탈당했으며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된 교구들은 가톨릭으로의 변화를 강제당했다.[* 그리고 이 교구들은 [[러시아 제국]]의 팽창기에 다시 정교회로 변화할 것을 요구받아 매우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대표적인 교회가 [[우크라이나]]를 위시한 [[루테니아]] 교회들이며 이 교회들은 지배 국가가 바뀔 때마다 준 내전 상태에 빠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