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경호(농구) (문단 편집) === 국가대표 센터 정경호 === 94-95 농구대잔치가 끝나고 홈에서 열리는 서울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을 위해 농구협회는 자칭 "사상 최강의 드림팀"을 구성한다. (가드: ~~[[강동희]]~~, [[허재]], [[이상민(농구)|이상민]], [[오성식(농구)|오성식]], 포워드: [[문경은]], [[김영만(농구)|김영만]], [[우지원]], [[현주엽]], [[정재근(농구)|정재근]], 센터: [[서장훈]], [[전희철]], [[조동기]]) 그러나 농구대잔치 8강전 연세대-삼성전자의 경기에서 상대팀의 지나친 파울로 선수생명의 위기를 겪었던 서장훈이 돌연 미국 [[NCAA]] 편입을 시도하고 이로인해 국가대표팀 소집에도 응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 유학은 핑계고, 한국 농구에 염증이 났다는 설이 파다했다.] 부랴부랴 서장훈의 대타를 찾던 이인표 감독과 농구협회는 그래도 한때는 주목받던 202cm의 장신 유망주(이때 이미 만 25세였다) 정경호를 긴급 소집하고 정경호는 얼떨결에 성인 국대 데뷔전을 갖는다. 당시 국대는 ~~[[강동희]]~~-[[허재]]-[[문경은]]-[[현주엽]]-[[전희철]]을 주축으로 구성된 3점 & 속공 농구였고,[* [[슬램덩크(만화)]]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풍전]] 농구부의 모델이 [[1990년대|90년대]] 한국 농구대표팀이라고 인터뷰한 바 있다.] 발도 느리고 공격력도 없는 정경호의 자리는 없었다. 대표팀은 4강에서 일본을 꺾고 결승에 올라 아시아 최강 중국팀을 만난다. 순준(SF, 198)-공샤오빈(PF, 200)-샨타오(C, 212)로 이루어진 초장신 프론트코트에 대항하기 위해, 이인표 감독은 대회 개막 후 처음으로 정경호를 주전 센터로 투입, 초반에 팀 수비력을 높이고 후반에 속공으로 승부하려는 작전을 들고 나오지만..... 점프볼 직후 샨타오, 공샤오빈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연이어 얻어맞고, 이후 바스켓카운트를 내주는 파울을 잇따라 범하면서 정경호가 4반칙에 걸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1분'''!!! 경기장의 관중들, 벤치의 코치진, TV를 보던 팬들 모두 사상 초유의 상황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장면이었다. 결국 이 날 경기는 [[허재]]의 맹활약에도 불구, 4쿼터 후반 [[현주엽]], [[전희철]] 등 빅맨들이 줄줄이 퇴장당하면서 9점차로 석패, 홈에서 26년만에 아시아선수권 우승 트로피를 노리던 대표팀으로선 [[서장훈]]의 공백이 다시금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1년 후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때에도 서장훈은 복귀하지 않았고, 정경호는 다시 한 번 국가대표로 소집되는데, 1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는 멤버의 대표팀은[* [[김영만(농구)|김영만]]만이 부상으로 [[양희승]]으로 대체되었다.] 세계무대에서 7전 전패 최하위를 기록한다.[* 아시아선수권 결승전에서 한국과 접전을 벌였던 중국은 세계 8강에 오른다.] 이때도 역시 서장훈이 없는 꼬꼬마 포스트진이 문제였는데, 에어본 전희철, 한국의 바클리 현주엽, 저승사자 정재근 등 국내에서 최고 스타로 칭송받던 오빠들이 세계대회에서 별 푸에르토리코, 앙골라 등 듣보잡(이라고 국내팬들만 생각하던) 팀들에게조차 연이어 털리는 모습이 국내 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후보센터로 들어와 엄청난 파울들을 보여주며 조기 퇴장당하던 정경호가 차라리 제일 열심히 뛰는 선수로 보였었다. 정경호를 제외하고는 포스트에서 수비 존재감이 있는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98-99 시즌 [[원주 DB 프로미|원주 나래]]에서의 깜짝 활약으로 인해 1999년 후쿠오카 아시아선수권 대표팀에 다시 한 번 이름을 올린다. 전희철이 공익근무로 인해 국대차출이 안되어, 역시 대체 선발로 합류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