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절운 (문단 편집) == 서문 == 옛날 [[문제(수) |개황]](581-9) 초에, 劉臻·顏之推·盧思道·魏彦淵·李若·蕭該·辛德源·薛道衡 등 8명이서 나, 육법언(陸法言)의 집에 찾아와 묵었다. 밤이 깊어 술자리도 무르익으니, 어느새 음운에 대해 토론하기에 이른다. 이는 고금의 음운과 성조가 이미 각기 달라졌는데, 학자들마다 취하고 버림 또한 다른 연유이다. 강동의 [[장쑤성|呉]]·[[후베이성|楚]] 지방은 소리가 가볍고 얕아졌고, 하북의 [[허베이성|燕]]·[[산시성(산서성)|趙]] 지방은 탁해졌으며, 서북의 [[산시성(섬서성)|秦]]·[[간쑤성|隴]] 지방은 거성을 입성처럼 읽고, [[쓰촨성|梁·益]] 지방은 평성을 거성처럼 읽는다. 또 支,,章移反,,와 脂,,旨夷反,,, 魚,,語居反,,와 虞,,語倶反,,, 先,,蘇前反,,과 仙,,相然反,,, 尤,,雨求反,,와 侯,,胡溝反,,가 각각 같은 운으로 합쳐졌다. 글의 길을 넓히고자 한다면 맑고 탁함에 있어 통용할 수 있으나, 만약 음운을 정확히 알고 싶다면 가볍고 무거움에 다름이 있어야 한다. 呂靜의 《韻集》, 夏侯該의 《韻略》, 陽休之의 《韻略》, 李季節의 《音譜》, 杜臺卿의 《韻略》 등의 책은 서로 간에 내용이 어긋나기도 하며, 강동에서 운을 취한 것이 하북과 또 다르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북의 음운에 대한 옳고 그름을 논하고, 고금을 통틀어 통하는 운과 그렇지 않은 운을 따져, 더 정제되고 정확한 것을 취하는 반면 투박하고 느슨한 것을 버리고자 하였다. 이를 결정하는 데는 顏外史와 蕭國子가 많이 기여하였다. 魏著作이 내게 말하기를, '여태까지 난제에 대해 토론하며 의심스러운 점을 다 풀었으니, 우리가 논한 바를 글로 적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리 몇 사람이 정한 대로 정해지는 것이지.' 나는 곧바로 촛불 아래 붓을 들고, 대강 요약하여 적었다. 나중에 너른 탐문과 남다른 변증을 거쳐 더욱 빼어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하였으나 다른 학문도 익히고 박봉의 관직에도 종사하다 보니, 십수 년간 자료를 고치고 모을 겨를이 없었다. 이제는 처음 입었던 관복을 물리고, 개인적으로 제자들한테 빼어난 글을 지으려면 음운을 알아야 함을 가르친다. 홀로 산야에 살며 교우관계도 끊고, 의문이 가는 점이 있어도 질문할 곳도 없다. 죽은 자는 생사의 길이 갈리어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수밖에 없고, 산 자는 귀천이 달라져 관계를 끊겠다는 뜻을 전했다. 결국 여러 학자들의 운서, 고금의 자서, 그리고 이전에 기록한 것들을 취하여 '절운' 다섯 권에 담았으니, 분석과 분별을 매우 세밀한 구석까지 하였다. 그러나 굳이 옥을 알아봐주지 않음에 슬퍼할 필요도 없고[* [[한비자]] 화씨(和氏)의 일화.], 천금을 걸 만큼 빼어나지도 않으며[* [[사기]]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명산에 보관하겠다'라는 [[사마천]]의 말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고, '가지고 장독이나 덮겠다.'는 [[양웅]]의 말에는 탄식한다. 어찌 이 책을 감히 뭇 사람들에게 널리 보이겠으며, 마당 밖으로 들고 나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는 본인의 독단적인 고집이 아니라 옛 현자들의 염원을 적은 바이다. 때는 신유년, 수나라 인수 원년(601)이다. [[분류:한자]][[분류:자전(사전)]][[분류:수당시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