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한 (문단 편집) ==== 여씨들의 천하 ==== || [[파일:attachment/20100820110041144.jpg|width=100%]] || || '''[[고황후 여씨|고황후 여치]]''' || 그러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는데, 유방은 제후왕들을 유씨로 바꾸었으나 유방 사후 정권을 차지한 '''[[여후]]가 조정의 모든 정권을 여씨의 손아귀에 주어버린 것이다.''' 생전의 유방은 태자인 [[혜제(전한)|유영]]을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총애하는 [[척부인]] 소생인 [[유여의]]를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치켜세우며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부인도 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유방에게 울며불며 매달리는 식으로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여후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방이 경계한 여후와는 별개로 태자인 유영-혜제 본인에겐 딱히 결격사유가 없었다. 전란에 지친 나라 입장에서도, 그리고 숙청 걱정을 덜고싶은 공신들 입장에서도 다정한 성격의 혜제는 오히려 이상적이면 이상적이었지 끌어내릴 이유가 전혀 없었고 적장자라는 정통성도 막강했기 때문. 유방이나 혜제가 건재하다면 여후라도 어쩌겠느냐는 생각도 했을 법 하다. 두 사람이 연달아 요절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당연히 유방의 계획은 적서는 물론이고 정실과 첩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극상을 권장하는 행동이나 다를 바 없었기에 곧바로 [[주창]](周昌) 등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으며, 이 당시엔 집에서 요양중이던 장량 또한 여후의 손을 들어주어 여후는 당대의 은둔명사인 '상산사호'를 모셔와 유방 앞에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자기가 불러도 --자기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진짜로 이게 이유였다고 한다. 유방은 입만 열면 욕을 하고 선비를 막 대해서 섬겨봤자 고생할 것 같아서 도망다녔고 태자는 효자에 성격이 착하다는 소문을 들어서 왔다.(...)] 오지 않던 명사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본 유방은 결국 태자를 폐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여의를 조나라 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희와 함께 가도록 했으며, 질투도 꽤 심한 여후가 자기가 죽은 후 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우려해 태자 폐위에 반대해 여후에게 도움을 준 주창을 조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여후는 유방 사후 잠시나마 [[조고]]가 한 것처럼 유방의 죽음을 숨긴 뒤 황명을 사칭해 공신들을 싹 제거하는 것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취해볼까 하는 속셈을 품기도 했지만, 조고보다는 현명했기 때문에 우연히 이 상황을 눈치챈 [[역상]]이 그러다가 내전이 벌어지면 감당할 자신 있느냐고 말한 것을 받아들여서 정상적으로 유방의 장례를 치르고 공신들은 건드리지 못하고 두었다. 그러나 내내 거슬렸던 유여의 모자는 여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방이 사망하고 아들인 [[혜제(전한)|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을 영항(永巷, 궁녀를 가두는 감옥)에 감금하고 하루 종일 쌀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에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한 후 제거하고자 했다. 조나라 재상이 된 주창은 여치의 의도를 파악하고 세 번에 걸친 소환 명령을 조왕의 병환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이에 여후는 주창을 소환한 후 조왕을 소환했다. 여의는 [[적모]]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했고, 혜제(2대 황제,위에 나온 유약한 태자 유영)의 혼신을 다한 선방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독살당했다. 여의의 사망으로 모든 기반이 사라진 척부인 또한 산 채로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귓속에 유황을 부어넣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 돼지우리에 던져 똥을 먹여 죽이고 말았다.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 척부인의 꼬라지를 자기 아들인 황제 혜제에게도 보여줬다.''' 아들이 척부인과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혀빠지게 노력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혜제는 이복동생인 여의를 살리기 위해 그가 조나라에서 소환에 응할 때도 성문 밖으로 직접 마중을 나와서 데리고 오고 항상 곁에 있으며 숙식을 함께 했다. 그러다 혜제가 어느날 아침 사냥을 가게 되자 '잠깐 동안은 괜찮겠지' 하고 나간 동안 여후는 여의에게 독주를 마시게 해서 죽였다.] 이 [[충격과 공포]]의 광경을 보고 만 혜제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어머니에게 말하고 드러누웠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태후]]의 아들이지만 이제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 >'''[[사기(역사책)|사기]]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중''' 1년 후 몸을 추스린 혜제는 그래도 어머니이니 애써 이해하려고 했으나, 혜제가 여후를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여후가 다름아닌 짐주로 또 서형 유비를 독살하려 하자 독주를 대신 마시려 하는 자살소동을 벌인 후 완전히 정사에서 손을 놓아버린다. 장안에 간간히 성을 쌓거나, 여후의 측근인 [[심이기]]를 죽이려고 하는 등의[* 유별나게 총애를 받은 심이기가 여후와 간통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활동 외에 완전히 칩거에 들어간 혜제는 이후 이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폐인과 다름없이 지내다가 23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 아들 혜제가 죽은 이후, 혜제의 양자인 [[전한 소제(3대)|전소제 유공]]이 즉위하지만 나이가 어렸었기에 섭정으로서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편 유방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연나라 왕의 자리를 자신의 친족인 여통에게 물려주고 군대의 수장들도 대부분 여록과 여산과 같은 자신의 친족들에게 맡겼다. 이 탓에 유공이 성장하면 보복할 것을 이야기하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 유공을 폐위시키고 [[전한 소제(4대)|중소제 유홍]]을 즉위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