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한 (문단 편집) ==== 유방의 공신 숙청 ==== [[토사구팽]] 여러 공신들이 상을 받은 한나라 초기에는 군국(郡國)이 103곳이나 존재했다. 이들은 한나라 땅의 3분의 2나 되는 막대한 영토를 조정으로부터 공의 대가로 받았다. 이로 인하여 조정이 직접 다스릴 수 있는 땅은 고작 15개 군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직할령 15군은 어떤 제후국보다도 많은 것이라서, 다른 제후국의 반란을 1:1로 찍어누를 수 있는 힘은 갖추었다. 거기다 동성왕(유방의 자식이나 일가친척들)과 이성왕(공신들 중 왕이 된 자들)이 혼재된 상황에서 동성왕은 아무래도 중앙 조정을 따를 가능성이 높았다.]. 황실에 당장 위협이 되는 세력은 유씨가 아닌 왕들이었다. 유방과 혈연 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이들은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고, 한때 [[초나라]]의 왕이었던 한신은 반란을 꾸민다는 모함을 받자. 유방은 슬슬 기반이 잡혔다고 판단이 되자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한신은 전부터 탄압을 하긴 했지만 어쨌건 죽은 것은 [[진희(한나라)|진희]]와 손 잡고 반란을 꾸몄기 때문이며 역이기를 죽였을 때부터 이미 찍혀있었고, [[경포]]와 [[장도]] 역시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기에 망했다. [[노관]]은 장도 대신에 연왕 자리까지 주었지만 역시 반란을 꾸미다 도망쳤다. 심지어 [[장오]]는 부하 관고 등이 유방을 암살하려고까지 했지만, 관고 등이 고문을 받으면서도 주인을 배신하자 않자 감동한 유방이 장오를 선평후로 강등시키는 수준에서 멈추었다. 진짜 억울한 사람은 [[팽월]] 뿐.[* 사실 그 팽월도 중앙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하였고(세금, 공물을 바쳐야 하는데 하지 않는 등), 그러면서 아랫사람들에게는 박하게 대했으니 어느 정도 자업자득인 구석이 있었다.] 토사구팽은 아니지만, 항우의 편을 들던 임강왕 공환이 유방의 회유를 거부하고 기어이 덤비다가 노관, [[유가]], [[근흡]]의 공격에 풍비박산났다. 대패한 후에야 항복했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라서 그대로 압송된 후 사형당했다. 기원전 201년, 연왕 [[장도(연왕)|장도]]가 [[천하통일]] 직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했다. 기원전 196년 유방은 양나라 왕인 팽월을 죽여 젓갈로 만들었다. 같은 해에 유방이 진희의 반란으로 출정한 사이 왕 자리에서 끌어내려진 채 지내고 있던 한신이 반란죄라는 명목으로 [[여후]]와 [[소하]]에 의해 살해된다. 겁을 먹은 [[영포]]는 이듬해에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해 죽었다. 비록 이러한 과정에서 유방 역시 영포의 군대에게 부상을 당해 죽었지만, 장사문왕 [[오예]](吳芮)를 제외한 나머지 왕들을 모조리 유씨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나마 오예는 봉지가 먼 변방이었고 본인도 처신을 잘 했던 데다가, 아들 [[오신]] 또한 매부인 영포가 반란했다가 도주해오자 오히려 직접 잡아다 바치는 등 다른 생각이 없음을 잘 어필하여 살아남았다. 또한 각 봉국의 재상과 고급 관료를 제후가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하게 하고 황제가 직접 임명하여 파견함으로써 제후들의 손발을 잘랐다. 실로 가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유방은 기꺼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 조금이라도 반란의 가능성이 생각된다면 모조리 찾아내 철저하게 짓밟아 버렸다. 아직도 봉건제의 이상에 취해있거나 한에 겉으로만 따르던 불순한 제후와 재상 그리고 신하들은 더 이상 이러한 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역모를 꾸밀 수 있는 역량 자체를 상실해버렸고 이러한 잔혹한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하나의 중국|중국은 마침내 진정한 첫 통일을 이루었다.]]'''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유방은 중국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였고 진나라 말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군사만 있으면 스스로 장군이니 왕이니 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숙청은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제후왕을 축출하는 것에는 의외로 제장들도 제법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일단 배가 아프기도 하고~~ 그들 또한 기왕이면 천하에 한나라만 남겨지길 원했을 것이다.[* [[남월]]의 [[조타]]가 남월왕으로 정식으로 인정될 때 사자로 파견된 [[육가]]는 '다른 사람들은 다 당신네를 멸족시키자고 하는데 황제만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신과 영포가 반란했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도 공신들은 빨리 파묻어 죽이자면서 호전적으로 주장했다.] 물론 별 이유도 없는데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 그랬던 사람은 또 거의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