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한 (문단 편집) === [[군국제]] 확립 === [[파일:중국 병마용 한대.jpg]] [[쉬저우]] (서주)에 남아있는 초왕의 무덤. 일개 제후왕의 부장품도 이 수준의 병마용을 가질만큼 권세가 컸다. 항우(項羽)는 [[장한]]을 격파하고 황제 [[영자영|자영]]을 자결시켜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스스로를 [[패왕]]이라 일컫고 봉건제를 부활시켰다. 일단 [[진나라]]와 진나라의 제도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을 시기였기도 하고, 항우 입장에선 자기를 따라 싸운 별장(別將)들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줘야 했다. 이리하여 장한을 옹왕으로, [[사마흔]]을 새왕으로, [[동예]]를 적왕으로, [[위표]]를 서위왕으로, [[영포]]를 구강왕으로 임명하는등 [[항우의 18제후왕 분봉|골고루 전부 왕을 시켜주었다.]] [[항우]]에 의해 한중왕이 된 [[고제(전한)|유방]]은 항우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항우와 격돌하다 [[팽성대전]]에서 패배해 위기에 봉착한 유방은 [[장량(전한)|장량]]과 [[역이기]]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이때 역이기는 멸망한 6국의 후예에게 봉토를 내려 공격하자며 봉건제를 주장하여 유방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장량은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인 유방은 봉건제도를 쓰는것을 포기하였다. 마침내 항우를 패배시킨 유방은 이제 한나라의 통치 제도를 정하여야 했다. 봉건제를 쓸 마음이 없었던 유방이지만 자신을 따라 싸운 [[공신]]들을 푸대접한다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일단은 7명을 왕으로 봉하고 공신들을 [[열후]](列侯)로 삼아 1개 [[현(행정구역)|현(縣)]]을 단위로 한 봉읍을 지급해 그곳에서 징수된 조세가 그들의 수입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왕국와 후국(侯國)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본받아 다스렸다. 이리하여 봉건제와 군현제가 섞인 통치 체제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군국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