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학공투회의 (문단 편집) === 결말 === 일단은 공동의 목표를 목적으로 한 "공투회의" 였지만 [[동상이몽]] 내지는 [[오월동주]]라고 부를 만큼 내부 노선 차이가 심했다. 대중집회가 열린다고 해도 각 파벌의 차이 때문에 무슨 그룹은 참여를 안하거나, 심지어 무슨 그룹은 경찰쪽으로 상대 파벌을 유도하는 등 그야말로 개판인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공투회의 자체가 집단간의 연합체였다 보니 공투회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싸움이 계속되어 몇몇 학교의 전공투들은 그대로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나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마르크스주의파|혁마르파]]의 산하단체로 변질되어 버리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 순간에 특정 파벌이 이탈하는 경우도 생겼다. 대표적으로 [[도쿄대 투쟁|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당시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마르크스주의파|혁마르파]]는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 사청동해방파 등이 전원옥쇄를 결의할 때 "전력보존"을 이유로 농성장을 이탈해 버렸다. 이들이 줄지어 퇴각할 때 나머지 파벌이 쌍욕을 퍼부은 것은 [[안 봐도 비디오]]. 결국 전공투 와해 이후 학생운동에서는 내부투쟁(内ゲバ; 우치게바)[* 우치(內; 내부) + 게바(Gewalt; ゲバ; 싸움)]을 거듭하면서 학생운동은 점점 세력이 약해졌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다양한 사상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도 엄청 다양하게 공개적/비공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를 이야기하는 분파, [[트로츠키주의]] 중 직접행동/도시게릴라 전술을 전략으로 삼은 분파([[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 역시 트로츠키주의지만 대중운동 및 [[로자 룩셈부르크|사상교양을 주 전략]]으로 삼은 분파([[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마르크스주의파|혁마르파]]), [[아나키즘|아나키스트]]들(흑색분트), [[마오주의]]자들(일본공산당 내 혁명좌파나 연합적군 일부), [[호자주의]]자들 등등 정말 많은 분파가 있었다.[* '''재수생 분파'''나 고등학생 아나키스트 분파가 있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한 단체들이 사회변혁의 역량을 집중시킬 필요를 느껴서 결집한 움직임이 전공투인데 내부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싸운 것.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범죄조직이 적대 조직 조직원들 습격해서 살해하듯이 실제로 상대 파벌을 납치, 살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http://banmakoto.air-nifty.com/photos/uncategorized/2013/10/28/uchigeba2.jpg|당시 사용된 무기들의 사진. '''일본도'''와 '''식칼'''에 주목.]] [[http://www.uranus.dti.ne.jp/~yuugeki/maru03.htm|당시 중핵파에 의해 살해당한 혁마르파 멤버들의 사진.]] 일부 [[테러리스트]]화한 집단은 [[테러]]를 주 수단으로 삼아 투쟁하다가 와해되기도 했다. 1971년에는 적위군이라는 공산주의 단체가 [[자위대]] 기지에 침투해서 자위대원을 [[http://ja.wikipedia.org/wiki/朝霞自衛官殺害事件|식칼로 살해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테러리스트화한 집단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적군파]]로 불리는 일본 연합적군이다. 연합 전 적군파와 혁명좌파(게이힌 안보공투)로 각자 따로 놀 때도 총포점 강도 및 그 엽총을 이용한 무장강도 등 싹수가 노랬으며 [[산악 베이스 사건|연합 이후로는 무단으로 캠프를 이탈한 멤버를 배신자랍시고 살해]]하거나 총괄이랍시고 애먼 트집 잡아 서로 [[인민재판]]하고 죽이는 등 아주 가지가지 했다. 연합적군은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 마지막 연합적군 세력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사라졌다. 종종 이러한 테러리스트화한 집단이나 삼파전학련을 전공투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서 "전공투는 과격투쟁을 일삼다가 검거되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공투는 연합적군이 검거되기 전에 이미 거의 와해되었다. 전공투는 각 대학의 각 주요당파의 연합체에 일반학생에 다수 참가한 형태로 특정한 사상이나 조직,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경과의 전개, 형태와 평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가두 투쟁을 행했던 삼파전학련이나 그것을 지도했던 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신좌파의 여러 당파와의 관계도 활자화된 기록이 중심이다. 또 삼파전학련과 전공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당사자도 존재한다. 아사리판이 따로 없다. 사실상 1969년 말쯤 되면 전공투는 중핵파, 사학동, 공학동 등 8개의 신좌익 당파가 장악한 "실질적인 당파 공투" 내지는 "캄파니아[* 캠페인의 [[러시아어]] 발음. 사회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직운동을 의미하며 [[북한]]에서도 캠페인 대신 깜파니아라는 단어를 쓴다.] 조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전공투가 남은 학교는 꽤 있었지만 앞서 말했듯 전공투는 단체간의 연합체였으므로 소멸 시점은 각 전공투마다 차이가 있다. 일단 도쿄대와 니혼대 전공투는 1969년 9월 5일 전국 전공투대회 때 동대 전공투 회장 겸 전국 전공투 의장인 야마모토 요시타카와 일대 전공투 회장 겸 전국 전공투 부의장인 아키타 아케히로가 검거된 이후 급속도로 쇠퇴해서 소멸했다. 게다가 계속되던 대학 내 분쟁에 대한 대책으로 유사시 교육부 명령으로 대학 전체의 업무를 중단시킬 수 있는 "대학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국회가 통과시켰다. 이렇게 되자 대학 내부의 문제를 내부에서 자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대학 자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대학 구성원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1969년 9월부터 대부분의 학교에 경찰 기동대가 출동했고 대부분의 바리케이드 봉쇄는 해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