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학공투회의 (문단 편집) === 전개 ===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학생 단체들의 연합체"를 모토로 했기 때문에 최대의 장점은 각 단체간 소통이 원활했다는 것이다. 전학련 시대처럼 중앙회의에서 결정난 것을 불복할 수 없다는 단점도 없었고 얼마든지 이의가 있으면 집회에 참가하여 단체 단위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매력으로 인해 기존 학생운동과 상관없는 독자적인 학생운동 그룹의 학생들도 가담하는 경우가 생겼다. 일본에서 "나도 젊었을 때 학생운동 좀 했었지" 하는 아저씨/할아버지들의 이야기가 대부분 이때의 이야기다. 이로 인해 정치적 스탠스는 한국의 [[86세대]]와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일각에서는 전학련/전공투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에 비유하기도 한다. 전자가 학생 시대에만 빡세게 운동하고 졸업 후에는 대기업의 요직을 거치거나 기성정당의 정치인으로 거듭났다는 점, 후자는 급진주의적 과격투쟁을 일삼다가 망하게 됐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는 하는데 전공투가 전학련의 수직적 질서나 기존 학생운동의 고루한 습관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나왔다.[* 전대협은 전학련처럼 타협적인 방식으로 나아갔고 그 덕분에 보수 정부에서도 시위를 막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총련은 그 전대협의 스탠스가 맘에 안 든다고 태재준 의장을 감옥에 보내 전대협을 해체시키고 한총련을 만들자마자 [[연세대 사태]]라는 대형사고를 쳤다. [[김대중]]은 연세대 사태에서 한총련의 해산을 요구했지만 도리어 한총련에게 비난받고 북한의 살해 위협까지 받으면서 이례적으로 안기부가 새정치국민회의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을 정도로 한총련은 초강경했고 김대중은 이때 계기가 되었는지 대통령 당선 이후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지정하여 씨가 마르도록 탄압했다.] 또 전공투는 이전의 학생운동의 소극적이고 타협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바리케이드]] 봉쇄'''라는 강력한 방식을 도입했다. 본관 건물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해 버리고 강사 및 직원의 출입을 막아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 또한 사상적으로도 "대학분쇄"나 "자기부정"이라는 이야기로 현대 산업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대안을 고민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때까지 학생은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고 정치 단체나 정당에서도 학생은 그다지 중요한 계층이 아니라고 평가했는데, 이들이 물리적이든 비물리적이든 직접행동에 나선 것. 전통적인 [[좌파]] 사상에 의하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기층민중, 다시 말해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하부 계층인데 학생은 이러한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잘 봐 줘 봤자 부르주아로 진입을 앞두고 있는 인텔리겐치아인데 이들이 자기 자신의 특권을 버리고 자본주의 재생산의 메카니즘에서 뛰어나오자고 한 것이다. 초기에는 앞서 말했듯 그 특유의 자유로움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학생 사회에서도 '''드디어 제대로 된 단체가 나왔다'''는 평가를 받았고 심지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일본 대학들의 운영진에서도 '''이제 우리가 이야기를 좀 들을 시점이 온 것 아니냐'''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심부를 차지하려는 몇몇 단체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인해 점점 한쪽으로 치우친 의제만 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운동 사회에서는 국제연대/협력이 중요한 모토였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 반대라든가 하는 의제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점점 극좌주의적 구호들(사회주의 국가 건설, 무장투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은 극좌부터 극우까지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한국보다는 사상에 대한 맹종이 덜 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논 포리(비정치성향) 학생들이 대거 빠져나가게 되었고 "강력한 투쟁의 중심세력 건설"이라는 모토로 결집을 유도하고 수직적인 구조를 다시 도입하게 되자 논 섹트 학생들까지 빠져나갔고 결국 '''다시 몇 년 전의 전학련'''이 되어 버렸다. 전학련 자체는 1960년대 초반 이후 신좌파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약칭 혁공동)의 산하 조직 일본마르크스주의학생동맹이 장악했고 혁공동은 [[국제주의|국제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따르고 있었다. 이 중심부를 이루고 있던 파벌이 일명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인데 이들은 사회주의학생동맹(사학동), 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과 함께 "3파 전학련"을 결성했고 196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대부분을 장식했다. 이런 자들이 전공투 성립 이후 전공투운동에 끼어들게 되면서 막장으로 흐르고 결국 도로 전학련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결국 과격파로 불리는 집단만 남은 것. 아니, 그때보다 더 강력한 무장을 통해 더 답이 없게 된다. 전공투가 그 정점에 도달했던 1968~1970년에는 한 번 움직이면 [[공성전]]을 벌일 수 있는 단체로 유명했다. 가끔 1960년대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1968년 10월 1일의 국제반전데이에 벌어진 신주쿠 소란사건도 이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국제 반전데이 집회에 전공투를 비롯해 심지어 비 정치적인 학생들까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나''' 싶어서 나왔다가 시위군중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것. 경찰은 이때 시위대에게 '''심야소란죄'''를 적용했다. 쉽게 말해 도쿄 중심가가 일시적으로 경찰 계엄령 상태에 돌입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 신주쿠 소란사건 당시 출동한 경찰 기동대원들 중에서 성우로 유명한 [[와카모토 노리오]]가 있었다. 한편 신주쿠 고등학교에선 학생 3명이 바리케이드를 세웠는데 이때의 3명 중 한 명이 [[사카모토 류이치]]이다. |[youtube(JcYRS9a7mpc)]| 당시 신주쿠 소란사건의 영상. || 앞서 말했듯 전공투의 장점은 각 연합체간의 원활한 소통이었는데 바꿔 말하자면 이게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할 때가 있었다. 바로 '''확실히 정해진 사령탑이 없다'''는 것. 이게 유사시에 큰 위기가 닥쳤을때는 오합지졸끼리의 이합집산만을 거듭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전공투 내부에서 정확히 어떤 단체인지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아무나 단체를 만들고 대충 이름을 그럴싸하게 지어서 "우리도 전공투 일원"이라고 하면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영화 [[박치기!]]에 나오는 장면 중 주인공들이 아무 대학이나 가서 "우리는 아리랑 해방전선이라고 하는데 투쟁기금이 필요하니까 쇠파이프랑 각목 좀 사줘"라면서 학생운동가들에게 쇠파이프를 파는 장면은 바로 이런 것에 기인한 것이다. 심지어 1968년 이후 전공투 운동방식은 [[고등학생]]과 [[재수생]]들까지 퍼져서 고등학교 전공투와 전국재수생공투회의까지 결성되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오사카부고교생연합이나 반전고교생협의회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공산주의자동맹이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같은 [[신좌익]] 파벌의 고교생 조직이었지 전공투는 아니었다. 당시 고등학교에서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전공투들이 결성되었는데 경우에 따라서 [[69(소설)|69]]에 나오는 것 처럼 허무맹랑한 경우도 있었고 고교생 학생 운동의 주축이 되었던 경우도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신주쿠 고등학교 재학 시절 신주쿠고교 전공투에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