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진(오호십육국시대) (문단 편집) === 부등의 최후 분전과 멸망 === 그 뒤, 위평이 이끄는 부한(枹罕)의 저족들의 세력을 얻은 부등(苻登)이 부비의 사망 소식을 듣고 386년 11월, 농동(隴東)에서 황제에 올랐다. 부등은 부견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후진의 요장과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를 펼쳤다. 초반에는 후진군이 많이 졌는데, 후진의 황제 요장은 부견의 귀신이 부등을 돕는다라 생각하고 시신을 훼손까지 했던 부견의 형상을 만들어서 그 형상에 자신의 잘못을 비는 코미디같은 짓을 했다(...). 이는 놀랍게도 《자치통감》에 기록된 엄연한 정사다. 당연히 도움은 없었다. 오히려 요장 진영의 군인들이 부견의 형상을 보고 놀라기만 했을 뿐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그 당시 상대하던 부등도 이를 인지하고 한 껏 비웃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그 상의 목을 베어 부등한테 보냈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뒤 요장의 후진군에게 부등은 대패해 뼈아픈 타격을 받는다. 그 뒤의 상황을 보면 전진의 세력이 투항했다가 전진이 쳐들어오면 그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는 일 등을 빼면 전진에 비해 후진의 세력은 안정적인 편이었고, 그 상황에서도 전쟁을 잇던 전진의 세력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394년 봄, 부견이 나오는 악몽 등을 꾸다가 고자가 된(...) 요장이 세상을 뜨자 부등은 그의 뒤를 이은 요흥을 얕보고 대대적인 준비를 해 후진과 싸우지만 요흥의 침착한 대응으로 대패했다. 그 뒤 부등은 산중에 숨어서도 재기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그 사이 자신의 막하에만 이름을 올린 채 거의 도와주지도 않던 금성(金城)의 걸복건귀에게 아들을 인질로, 누이동생을 왕후로 보내 10,000명의 기병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394년 7월에 요흥의 대군이 걸복건귀의 원병을 맞으러 산에서 내려온 부등을, 원군이 오기도 전에 사로잡아 처형시켰다. 그 뒤로 부등의 태자 부숭이 황중(湟中)에서 황제에 오르지만 오히려 걸복건귀의 군사에게 쫓겨나 땅을 빼앗겼다. 그래서 부숭은 [[구지]]의 양정에게 도망가 그의 밑에서 전진의 부흥을 꿈꾸지만 끝내 구지의 양정이 걸복건귀에게 지면서 그도 같이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394년 전진은 완전히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