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진(오호십육국시대) (문단 편집) === 부견의 비상과 비수대전 === 그 뒤 355년 6월, 관중을 통일한 지 1년도 채 안 지나 부건이 병으로 죽었다. 원래 태자였던 부장(苻萇)은 [[환온]]의 1차 북벌 때 다쳐 354년에 죽었다. 이에 새로 세운 태자인 부생(苻生)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애꾸였던 데다가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었던 부생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명재상 부웅의 뒤를 이었던 부견(苻堅)도 목숨이 위험해지자 반정을 계획했다. [[왕맹]](王猛)[* 325~375. 자는 경략(景略)이다. 어려서 빈천하였으나 박학하였으며 병서(兵書)를 좋아하였다. 화산(華山)에 은거할 때 동진(東晉)의 [[환온]](桓溫, 312~373)이 왕맹에게 같이 남쪽로 내려갈 것을 원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357년에 부견이 즉위하여 왕맹을 불러보고는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만난 것에 비유하며 중용하였다. 370년에 전연(前燕)을 쳐서 멸망시켰다.]이라는 명재상을 얻자 그는 357년, 반정을 일으켜 폭군 부생을 폐위・살해하고 전진의 천왕(天王)에 올랐다. 그 뒤 부견은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면서 국력을 키워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로의 확장을 시작하면서 동진의 [[형주]](荊州)를 공격하고 이듬해 367년에는 농서(隴西)를 정벌한다. 하지만 그해(367) 전진의 황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시안(도시)|장안]]을 뺀 관중 전체가 조각조각으로 나뉠 만큼 전진은 위험했다. 그러나 당시 [[전연]](前燕)의 정권을 잡던 권신 모용평(慕容評)이 소극적으로 대처하자, 368년 한 해를 모두 써 부견은 반란 평정에 성공했다. 369년에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자 전연에서 구원군을 청하며 [[낙양]] 근교 호뢰관(虎牢關) 서쪽의 땅을 할양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자 왕맹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연에 군사를 보내주어 환온의 북벌군을 물리치는 것을 도와줬다. 그 뒤 전연의 황족 [[모용수]](慕容垂)가 망명해오자 그를 받아들이고 호뢰관 서쪽 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369년 말에 전연을 공격했으며 370년에는 전연을 멸망시켰다. 373년에 동진의 [[쓰촨 성|사천]](四川) 지방을 정복하고, 승상 왕맹이 죽은 뒤인 376년에는 [[전량(오호십육국시대)|전량]](前凉)과 [[대나라]](代)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고 동진의 장강 이북을 차지하며 서역을 평정하여 오호십육국 시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한반도 국가와의 교류도 이때 활발해 졌는데,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망명한 [[전연]]의 간신 모용평[* [[모용수]]와의 대립으로 모용수가 전진으로 망명하는데 지대한 도움을 준(...) 인물이다.]을 묶어 전진으로 압송시켰으며 [[소수림왕]] 때 전진의 승려 순도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신라도 377, 382년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신라”라는 국호를 가지고 방문하였다. 이때만 해도 통일 [[플래그]]가 선 듯 했는데...'''[[내려갈 팀은 내려간다|여기서 문제가 나왔다.]]''' 부견은 [[동진]]까지 멸망시켜 천하통일을 이룩하고자 했지만 '''[[비수대전]]'''(383)에서 궤멸하면서 그 꿈이 좌절되었다. 이로써 부견에 의해 천하통일을 할 뻔했던 중국 대륙은 다시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들어 '''2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수문제]]에 의하여 통일을 이루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