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진(오호십육국시대) (문단 편집) === 초기 팽창 === 황하 연안에서 할거 중이던 포홍(蒲洪)은 [[후조]](後趙)와 [[염위]](冉魏)의 대립으로 화북이 혼란해지자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성을 부(苻)로 고쳤다.[*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도참설에 따른 것으로 당시 세간에는 "초부응왕(草付應王)"이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포홍의 손자였던 견(堅)의 등에도 초부(草付)라는 글씨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포홍은 "초(草)(艸)"와 "부(付)"를 모아서 "부(苻)"로 성을 삼았다.] 부홍은 서쪽으로 진격해 옛 근거지 [[관중]]을 점거하려 했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부홍의 뒤를 이은 [[아들]] [[부건(전진)|부건]](苻建)은 삼진왕의 칭호를 버리고 [[동진]](東晉)의 관작을 따르면서 관중으로 진격했다. 장안 지역에서 할거하던 두홍(杜洪)은 방심하다가 부건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부건은 역시 옛 근거지 관중으로 돌아가려는 [[강족]]의 요양(姚襄)을 격파하고 관중에서 하남 일대에 걸쳐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351년 부건은 동진의 관작을 버리고 [[천왕]](天王)에 올라 국호를 대진(大秦)으로 정하였으며, 이것이 전진(前秦)이라 불리는 왕조의 시작이다. 352년에 부건은 마침내 [[황제#s-2|황제]]에 오른다. 그 뒤 고조 경명제 부건은 두홍의 잔당을 소탕하고, 관중으로 쳐들어온 동진의 [[양주(중국)|양주]]자사 사마훈을 물리치면서 관중을 평정해 나갔다. 그 뒤 동진의 [[북벌]]군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지만, 승상 부웅(苻雄, 3대 황제 [[부견]]의 아버지)이 잘 대처한 덕에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관중 평정 뒤 행한 논공행상에서 부웅은 이름을 못 올렸는데 그가 관중 평정 2개월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듣자 부건은 피를 토하며 곡을 했다고 한다. "하늘이 나의 사해 평정을 안 바란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나의 원재(元才)를 이렇게 빨리 빼앗아 가는가?"라는 부건의 말에서 명재상 부웅을 잃은 부건의 슬픔이 잘 드러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