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주교육대학교 (문단 편집) === 09년 동맹휴업 === 전국적인 TO 대학살로 일어났다. 사실 모든 동맹휴업은 대부분 TO나 교대통폐합등 [[밥그릇]] 문제에서 시작한다. 전주교대는 태풍의 눈에 해당하였다. 10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진행되었는데, 당시 썰을 풀자면 정말 한도 끝도 없다[* 일단 부총학생회장이 투쟁도중 군대에 끌려갔다ㄷㄷㄷ] 동맹휴업 초기에는 모든 교대가 합심했으나, [[서울교대]] ~~우린 TO보장임~~가 먼저 동맹휴업을 중지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얘들이 적극적으로 투쟁한 적이 있다. 서울 지역가산점 폐지설 때. 이 때 오직 서울교대만 투쟁했고 다른 교대는 모두 환영했다는 풍문] 당시 상황이 동맹휴업을 계속하면 4학년이었던 06학번이 수업시수 부족으로 임용고시를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이었고, 워낙 TO가 개쪽박 [* 4500정도 났다]이었기에 차라리 임용을 포기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전북은 그 당시 280이었다. 졸업생이 450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서울은 원래 항상 TO가 보장되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모든 투쟁에서 소극적이었다. 교대협에서 짠 그림에 의하면 전국 교대 06학번들이 아무도 임용고시에 응시하지 않으면서 정부에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06학번들은 투쟁에서 빠지기 시작하고 3학년이었던 07학번들이 실습을 가야하는 상황과 당면하면서 동맹휴업이 흔들렸다. [* 그 때 당시 몇학교가 3학년 실습이 11월에 잡혀있었다.][* 루저녀 사건 때문에 남학우와 여학우 사이 갈라짐] 그리고 학교 전통상 3학년 집행부가 2학년 집행부에게 실권을 위임하는 시기가 겹치면서 동맹휴업의 진행을 어느 학번이 해야하는지에 대해 힘을 쓰는 등, ~~이래서 정치가 힘들어~~ 동맹휴업의 취지가 많이 어긋났었다. 대부분 교대가 동맹휴업을 그만 두길 원했지만, 정말정말 막강한 당시 총학[* 총학생회장과 부총의 포스를 설명하자면 김구와 나석주]이 동맹휴업을 이끌어가길 원했으며 동맹휴업을 끝까지 진행하자며 다른 교대에 원정대를 보내기도 하였다.[* 동맹휴업을 계속 하자며 플랑을 들고 소리통을 했다][* 네이버에 '''전주교대 원정대'''로 검색을 하면 뉴스 기사까지 뜬다] [*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글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univ_edu&no=59812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univ_edu&no=59449&page=] 이 당시 정말 교대생들의 끝을 보여주었다. 정말 투쟁을 열심히 해야하는 학번들이 오히려 투쟁에 동참하지 않은 것. 더군다나 08학번은 예비역~~이라 부르고 장수생~~의 비율이 정말 높았다. 장수생들은 06, 07학번의 이중성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했고, 투쟁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해 투표했다. 더군다나 06년 동맹휴업때 배신당했던 과들은 폭망한 선배들을 본 학습효과로 인해 이번에는 속지 않으리라하며 당연히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었고, 06년때 배신한 과들이 이들을 비난하자(물론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번속지 두번속냐?"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