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상엽 (문단 편집) == 평가 == 학도병 시절 일본군에 대한 반란 시도, 북한체제에 실망 후 남한으로 넘어온 뒤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6.25 참전 등은 어려운 상황일수록 기꺼이 희생정신을 발휘하고자 하는 성품에서 나온 행동으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전상엽 지사가 군제대 후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들어선 어느날 시내버스 라디오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뉴스가 나오자 성토하듯이 승객들이 모두 듣도록 큰 소리로 유신정권을 비판했고 버스기사는 곧바로 버스를 정류장이 아닌 경찰서 앞에 세우고 전상엽 지사를 불순분자로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이런 광경은 당시의 군사독재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고 그만큼 위협적인 환경이었지만 평범한 사회의 일원으로서도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본인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북에서 도망치듯 남한으로 넘어와 아무런 기반도 없이 전쟁까지 겪으며 서울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고 생활을 하였으나, 자녀들은 역시 이북에서 온 부인과 함께 기업체의 대표, 의학박사, 대학교수 등 대한민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원으로 키워냈고, 전상엽 지사 역시 항일투쟁과 6.25참전에 대한 이력을 모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에 다행히 노년에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상엽 지사의 6.25 참전기록과는 달리 항일투쟁기록은 모두 이북에서 있었던 일이어서 대한민국 정부에 입증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결국 전상엽 지사 및 동지들의 항일투쟁 사실을 파악하는데 정부가 일본측의 자료도 활용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패전국으로 철수하면서도 투옥된 애국지사들의 죄목과 형량 등의 내용을 담은 서류를 폐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부 자료는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고 그 자료들이 항일투쟁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전상엽 지사는 90세가 넘은 후에도 테니스를 즐길 정도의 건강체질이었으며 2016년 8월 5일 96세로 별세할 때까지 노년에는 항일투사 중 드문 생존자로서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로부터 원로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청년기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비교적 이른 나이의 항일투쟁, 이후 6.25참전, 그 후 군사독재와 남한의 경제발전 및 대한민국의 민주화라는 주변환경과 가치관이 격변해온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를 모두 겪은 역사의 증인이라 할만하다. 단, 군사독재에 비판적이었던 전상엽 지사는 말년에 목도한 대한민국의 진보적 분위기가 팽배하는 사회변화에 대해서도 일면 비판적이었는데, 실향민으로서 6.25전쟁을 겪고 공산주의와 싸웠으며, 북한의 몰락을 본 입장에서 북한의 지도층을 우호적으로 대하려하고 공산주의 느낌이 날 수도 있는 부의재분배를 강조하려는 정부 분위기가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저서 <천명天命>에서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경험과 생각을 일부 엿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전상엽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16년 8월 8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평원군 출신 인물]][[분류:이학 교수]][[분류:1921년 출생]][[분류:2016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장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